The Bourne Supremacy / 본 슈프리머시 (2004)

『본 슈프리머시』가 『본 아이덴티티』와 다르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전편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조된 액션의 강도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의 긴장감과 불안함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며, 액션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관객을 도와주는 촉매역할을 한다. 현란한 카메라웍과 편집은 액션의 속도와 물리적 현상에 왜곡을 가한다. 그 덕에 제이슨 본이 펼치는 액션은 엄청난 완력의 맞부딪침으로 승화되었다. 마치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힘들의 대결. 내 눈엔 이것을 현실적이라 말하는 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본 슈프리머시』의 액션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그래서 더 빠져들 수밖에 없다.


영화는 조용히 살고 싶었던 제이슨 본을 다시 음모의 바다로 끌어들이기 위해 연인의 죽음과 함정을 설정, 배치하고 그의 어두운 과거 한 토막을 꺼내온다. 1편에서 등에 맞은 몇 발의 총상(으로 인한 기억상실증)으로 살생의 삶을 뒤로 하고 선인의 길을 가겠다는 그의 이상한 의지를 새삼 탓하려는 것은 아니나, 영화의 설정 자체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 작위적인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본 슈프리머시』는 기관내부의 적과 애꿎은 누명을 쓴 주인공, 그리고 그들 사이에 용의자를 점점 이해하게 되는 내부의 인물을 데려다놓는 전형을 피해가지 않는다. 여기서 모든 설정은 제이슨 본의 놀라운 컴백을 위해 구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것으로 그들이 왜 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야 하는지도 설명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은 결국 액션이다. 덕 라이먼의 버전에 비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폴 그린그래스의 액션연출이 바로 『본 슈프리머시』의 정체성이다. 또한 제이슨 본의 용의주도함은 『본 아이덴티티』에서보다 더욱 치밀해져서 때로는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는데, 예컨대 나폴리에 억류된 제이슨 본이 대사관 직원을 때려눕히고 휴대폰까지 도청하는 장면과 호텔을 수소문하여 파멜라 랜디(조운 앨런)를 찾아낸 뒤 작전이 펼쳐지는 지역까지 미행하는 장면 등이 그렇다.


그러나 액션의 현란함을 차치하고라도 진지함으로 무장한 『본 슈프리머시』에서 여전히 유효한 것은 결국 개인의 문제다. 결론적으로 일종의 속죄의 길을 떠난 셈이 된 제이슨 본의 모험은 국가의 이익(혹은 특정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삶(그리고 타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며, 이는 현재 국가를 대신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 즉 미디어와 자본의 틈바구니 속 우리의 위치는 어디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파생될 여지를 남겨둔다.

영화의 후반부 추격전 장면에서 본을 집요하게 쫓던 키릴(칼 어반)을 확인사살하기 위해 다가간 제이슨 본은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떠난다. 우리는 본이 피투성이의 키릴에게서 둘 모두 집단의 논리에 휘둘린 같은 개인으로서의 연민을 느꼈을 것이라 확신하며, 이것은 『본 아이덴티티』의 프로페서(클라이브 오웬)를 통해서도 이미 드러난 이 영화의 주된 감성(소모되는 개인에 대한)일 것이다(이 물음은 3편에서도 이어진다). 제이슨 본이 그가 죽인 네스키의 딸(옥사나 아킨쉬나)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나오는 장면에선 절룩거리는 본 앞으로 무성한 아파트 숲이 펼쳐진다. 개개인이 모여 거대한 단지를 이루는 아파트는 순간 그가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나 먼 사회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따뜻한 불빛으로 눈밭속의 그를 감싸주는 관객의 연민 같기도 하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2007/10/11 - The Bourne Ultimatum / 본 얼티메이텀 (2007)
2007/10/09 - The Bourne Identity / 본 아이덴티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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