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란 (2001)

요사이 ‘허세’라는 말이 유행인가보다. 사전적 의미로 ‘실상이 없는 기세’를 일컫는다. 겉으론 강한 척, 무언가 있는 척 하지만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란 얘기다. <파이란>의 강재(최민식)가 그런 인간이다. 조직동기는 벌써 보스가 되었는데 그는 업소 ‘삐끼’와 ‘웨이터’ 사이에서 선택할 권리도 부여 받지 못한 말단 조직원이다. 겉으론 의리와 충심 빼면 시체라는 이 세계에서 까마득한 후배들에게조차 인사를 받지 못하고 사채 빚 독촉협박작업에 함께 따라갔다가 방해만 된다며 ‘쿠사리’만 듣는다. 유일하게 그가 머물 자리였던 비디오 대여점은 구치소를 며칠 갔다 온 사이 다른 후배놈이 꿰찼다. 말이 조직원이지 나이만 먹었을 뿐 어디에서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강재는 더욱 허세를 부린다. 안이 빌수록 나이를 들먹이고 마음이 여려질 때마다 입으론 육두문자가 튀어나온다.

그도 시작점에선 저 눈 앞에 보이는 보스의 고급승용차에 앉아있을 중년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고향을 떠나 어느새 중년이 된 그는 삼류인생의 동네 양아치가 되고 말았다. 나이에 걸 맞는 위치를 차지하기는커녕 이곳 저곳에서 손찌검과 발길질과 모욕을 당하는 그런 막장인생이다. 어느 날 강재는 친구이자 조직의 보스인 용식(손병호)과 술을 먹다 그가 술김에 반대파의 조직원을 살해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바다에 시체가 떠오르자 용식은 강재에게 자기 대신 교도소에 들어가 달라고 부탁한다. 강재는 고민 끝에 고향에서 부릴 배 한 척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그 제안을 수락한다. 이때 경찰로부터 강재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의 이름은 파이란(장백지). 강재와의 위장결혼으로 한국에 머물며 돈을 벌 수 있게 된 중국처녀다.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유흥업소에 끌려갈 순간을 기지로 극복하고 겨우 시골 세탁소에 자리를 잡은 이 여자. 말도 안 통하고 일도 고되지만 그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소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다. 따뜻하게 대해주는 주변사람들이 있어도 파이란이 줄곧 가짜 남편인 강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는 비록 돈이 오고 간 일이지만 그녀를 한국에 머물 수 있도록 해준 유일한 방법이 그였으며 아는 이 없는 이곳에서 오로지 그만이 서류상으로나마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파이란에게 강재는 고마움과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의 순간적인 감정이었는지 어쩐지는 중요하지 않다. 생존이 절박했던 그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녀는 외로웠다. 그리고 보살핌 없이 병든 채 죽었다.


그러니까 강재도 외로운 사내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앞으로도 남길 일 없는 이 하류인생의 한복판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뜨리는 이 남자는 너무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다. 누구 탓이든 간에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고 이 여인의 젊은 한 삶도 비참하다. 그녀의 외로움이 그녀 스스로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안쓰럽다. 그도 한없이 외롭기 때문이다. 현실의 우리라고 다를 것 없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안이 텅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강재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은 그 안의 공허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다른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을 엿볼까 봐, 그래서 그 열린 상처의 틈으로 아프게 파고들어올까 봐 겉으론 더욱 강한 척하지만 어쩌면 저마다 속으론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게 파이란과 강재처럼 서로 엇갈리거나 비극으로 끝이 나는 그 순간이 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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