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 / Watchmen (2009)

 

잭 스나이더의 전작인 <300>은 이야기야 어쨌든 눈 앞에 펼쳐진 시각적 황홀함에 맘껏 도취될 수 있는 영화였다. 감독의 의도가 그래픽 노블인 원전의 완벽한 재현인지 아니면 그저 압도적인 비주얼에 대한 탐닉인지 그 속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스크린 안의 왜곡된 속도와 장렬한 육체로 수식된 액션씬을 바라보고 있자면 보는 이의 뇌 속엔 이미 공허한 이야기에 대한 불평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영화가 차용한 역사의 한 조각은 원작만큼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을 테지만 그것이 어떤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러닝타임 동안은 말이다.

이는 <왓치맨>이라고 그다지 다르지 않다. 영화엔 여전히 그래픽 노블이 가진 스타일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묻어나고 그 안에서 역사가 뒤틀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암울한 슈퍼히어로 이야기에선 레이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닉슨이 있고 케네디의 암살범은 히어로 중 한 명으로 드러난다. 미국은 힘은 세고 자비는 없는 그들을 베트남전에 파견해 손쉽게 승리를 따낸다. 영화의 오프닝은 역사적 사실에 등장인물들을 끼워 넣고 그 대상을 패러디하면서 이 흥미로운 가상의 세계관을 관객에게 친절히 설명한다. 바로 정부와 큰 권력의 수족이 되어, 민중을 구할 순수한 정의감조차 상실해버린 이상한 슈퍼히어로의 세계 말이다.


그러니까 <왓치맨>은 망토를 뒤집어쓴 영웅들이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바로 이 시기에 영화로 잘 태어난 것 같다. 지금은 스타의식에 우쭐해진 스파이더맨, 법 위에 서 있음을 과시하는 배트맨, 차별 받고 상처 입은 엑스맨들의 세상이니까.

 


<왓치맨>의 히어로들은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사실 영웅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시위 현장에 투입되어 시위자들을 가차없이 쏴 죽이는 것은 물론, 아무리 범죄자들이라 해도 인권이 어쩌고 저쩌고 떠벌리기 전에 다리를 분지르고 이마에 총알을 박고 팔을 절단 내는 자들이 <왓치맨>의 히어로들이다. 정부의 꼭두각시가 된 채 베트콩들을 터뜨리거나 귀찮다고 임산부를 살해하는 모습은 영웅이 아니라 살인기계, 범죄자의 그것에 더욱 가깝다. 설령 어쩌다 화재로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한 후라 할지라도 스스로 도취되어 섹스의 향연을 펼치는 영웅들. 이들은 이렇게 거침없는 폭력의 세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아도취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이 혼돈의 도시에서 히어로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될 뿐 구원의 메시아를 뜻하지 않는다.


그러니 히어로들이 등장할 때마다 갖은 폼을 다 잡고 꽤 심각한 표정을 지어도 외려 유치하게 보일 뿐 멋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이 자신을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려 할수록 영화 밖에서 그것은 진지해서 더 웃긴 조롱으로 탈바꿈한다.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들에서라면 주인공의 아우라를 그대로 간직할 코스튬도 마찬가지. 가면과 쫄쫄이 의상에 집착하는 영웅들은 씁쓸한 웃음의 대상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뒤집어진 영웅의 세계는 더욱 불가해한 것이 되어간다. 현실의 역사를 끌어온 배경 안에서 과연 인류를 위한 궁극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역설하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현실인식과 과대망상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쥐뿔만큼도 영웅답지 못한 이들은 결국 그들만의 궤변(대학살이 인류의 평화로 귀결된다는)에 사로잡힌다.


<왓치맨>은 영웅의 세계를 맘껏 뒤틀고 수많은 메타포를 쏟아낸다.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만큼 영웅들의 숫자도 많아 하나하나 그 탄생의 시발점을 쫓아가는 것만 해도 숨이 차다. 그러다 보니 내용의 전개에 탄력 받을 시점을 종종 놓치곤 한다. 이를테면 <왓치맨>은 캐릭터에 따라 나뉜 여러 개의 에피소드들을 죽 나열하고 서로 이어지는 단서들을 골라내 하나씩 연결하는 식이다. 전체로 보면 그 나름대로의 숲이 보이는 한편, 개개의 나무가 가진 개별적인 스토리 또한 함께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원작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라는 걸 알지만 두 시간 반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마주한 관객의 입장에선 사실 버겁다. 그래서 <왓치맨>을 보고 나면 잭 스나이더가 보여준 비주얼의 미학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도 그 장황해진 이야기에 움츠러든다.

영화에 대한 호부가 갈리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원작의 팬들 사이에서도 그 좋고 싫음의 의견이 다양해지겠지만 나처럼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본 사람은 차라리 원작을 한번 읽고 봤다면 하는 일종의 아쉬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그랬다면 한차례의 쉼도 없이 떠벌려지는 이 낯선 히어로들의 세계가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느껴지지는 않으리라. 길게 진행되는 이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대신, 동시에 영화와 원작간의 차별점과 공통점을 재보는 데 또 다른 정력을 소비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300>과 마찬가지로 액션의 한 장면 한 장면이 뇌리에 깊이 각인될 만큼 인상적인 이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아찔함이나 두근거림보다 느긋한 기다림에 더 가까운 감상을 낳는다. 한마디로 좀 지루하단 얘기다. 어쩌면 매 장면과 각각의 이야기로 스크린이 빈틈없이 꽉 차기를 바랐던 감독의 의도가 조금 과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좀 애매한 영화에 대한 감상과는 달리 영화의 사운드트랙은 정말 좋다. 타일러 베이츠(Tyler Bates)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아니라 기존의 곡들에서 선곡된 노래들이 그렇다. 특히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의 ‘All Along The Watchtower’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의 ‘Hallelujah’는 단연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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