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파이언스 / Defiance (2008)

 

인류의 비극 중 하나였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숱한 헐리웃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실화라는 강력한 흡인력의 도구를 밑에 깔고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인간의 야만성과 생존력, 그리고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에 함께 담아낼 때면 대개의 관객들은 살육의 현장이 일으키는 경악과 그러한 공간에 살고 있지 않다는 안도 사이의 감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곤 했다. 헐리웃, 아니 미국사회 전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현실이 이런 영화들의 제작과정에 입김을 불어넣었음은 쉬이 유추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지원과 함께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들은 상업영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전쟁영화로서의 스펙터클과 감동의 드라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오랜 세월 준비해 왔다는 <디파이언스> 역시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다. 벨로루시의 숲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이끌며 나치에 저항했던 비엘스키 형제에 관한 기록이다. 영화는 집단의 리더였던 투비아 비엘스키(다니엘 크레이그)를 메인 캐릭터로 삼고 고난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이들 집단의 에피소드들을 담는다.

 


전장을 헤쳐나가는 이야기에서 으레 기대되는 것은 영웅이 된 리더다. 그는 단호한 결단력과 현명한 판단력, 뛰어난 생존력과 가공할 전투력을 모두 갖춘 무결점의 사나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디파이언스>의 투비아는 때때로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거나 결정의 순간에 머뭇거린다. 그 역시 리더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미덕을 두루 갖추곤 있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면모 위에 세워진 것이기에 적잖이 공감을 일으킨다. 영화 속 투비아가 집단의 평화로운 존속을 위해 행하는 몇몇 행위들이 윤리적 정당성으로서의 의심을 유발할 때도 당시의 극단적인 상황 하에선 그런 행동이 어렵사리나마 이해될 수 있었음을 <디파이언스>는 설득한다. 과도한 보복은 불필요하다는 투비아와 강경론자인 동생 주스(리브 슈라이버) 사이의 갈등 또한 발생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고, 이 집단이 여러 가지 견해가 충돌하는 평범한 인간들의 것임을 상기시킨다. 적어도 평면적으로 그려진 나치와의 대결구도를 제외한다면 영화가 가지는 인간에 대한 태도는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고 비교적 공정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영화를 보다가 이것이 역사의 기록 그 자체가 아니라 상업영화였음을 새삼 깨닫기 시작할 때부터다. <디파이언스>는 실화소재를 바탕으로 한 것 외에 또 다른 흡인력의 요소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영화는 전쟁영화의 스펙터클을 재현할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으며 지옥 같은 전장에서 피어나는 감동의 스토리마저도 포기한 듯 보인다. 이 두 요소를 지나침 없이 잘 버무려 걸작의 반열에 오를 야망이 보이지 않음은 물론이다. 그저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비엘스키 캠프의 생존기는 수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우리의 면역체계를 단련한 지금 그다지 새로운 것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 익숙함은 저 현실의 중동상황이 스멀스멀 일으키는 묘한 반감마저 이겨내지 못한다. <디파이언스>가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한 여타 영화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기 일쑤였던 유대인들을 저항의 주체로 그린 점을 강조하려 했다고 치더라도 그 의도는 영화의 무미건조함에 묻혀 희석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에 완전히 갇히지 않고 극한 상황하의 인간적인 리더의 모습을 잘 표현해낸 다니엘 크레이그의 고군분투, 그 뿐이다. <디파이언스>는 지루하고 특색 없는 홀로코스트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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