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안정효)



글을 ‘쓴다’는 표현보다 ‘끼적댄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전자가 말 그대로의 뜻이라면 후자는 ‘글씨를 아무렇게나 갈겨 쓰는 모양’이라는 사전적 의미처럼 자신의 행위를 조금 낮춰 일컫는 느낌을 준다. 두 단어를 굳이 구별해 쓰는 이유는 내가 이 장소에 남기는 글들이 직업적 투철함이나 견고한 사명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취미의 일환으로 쓰여지는 것이며, 그래서 그 결과물이 완성도의 편차를 보이더라도 무겁게 고민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하자는 일종의 사전 방어막을 쳐놓기 위해서이다. 부담 갖지 말고 마음을 편히 하자는 얘기다.

하지만 글을 꾸준히 올리고 있는 만큼 가벼운 글을 ‘끼적대’지 않고 설득력 있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없지는 않다. 그때가 올는지 모르지만 이곳에 문자를 배열하고 있는 내가 부쩍 자랑스럽고 떳떳해 보일 그런 순간을 기대한다. 그때라면 더 이상 ‘끼적거’린다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그 순간에 다가갈 시간을 조금 앞당겨 보고자 선택한 책이다. 이 책은 <하얀 전쟁>과 <은마는 오지 않는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의 소설과 수많은 번역서들로 알려진 작가 안정효가 독자에게 글쓰기의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지침서다.

총 다섯 챕터로 이루어진 <글쓰기 만보>는 단어의 선택에서부터 문장의 완성, 단락의 나눔, 문체에 대한 고민, 글을 쓰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글쓰기에 대한 실로 방대한 영역을 한꺼번에 아우른다. 그렇다고 이 책이 모든 분야의 글쓰기에 대해 조언하고 있지는 않다. 책의 초점은 소설쓰기라는 저자의 전공분야에 좀더 맞춰져 있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저자의 말투가 너무 딱딱하지도 않으면서 풍부한 예문을 포함하고 있고, 또 간혹 내주는 과제들로 글쓰기에 대한 실질적인 연습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번역과 창작에 관한 강의 경험이 많은 저자는 마치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다루듯 독자를 대한다. 실질적인 글쓰기 기술을 가르쳐주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다양한 소재로 글쓰기를 실습해 볼 것을 권하면서 읽는 이에게 과제를 제출하는데, 작가가 제시하는 모범답안이 책에 실려 있지만 꼭 그것에 맞출 필요는 없음을 함께 강조한다. 언제나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과 응용력이 성공적인 작가의 필수요건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가르침은 <글쓰기 만보>의 앞부분만 읽어보더라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자신이 써놓은 글에서 ‘있었다’와 ‘것’과 ‘수’를 지워내는 것이나 ‘그런 것 같다’는 확신 없는 애매한 표현을 지양하는 것, 또는 서양식 어법으로부터 온 수동태의 남용을 자제하고 ‘그리고’, ‘그래서’ 같은 접속사의 사용빈도를 줄이라는 지침 등은 복잡한 훈련과정 없이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아주 실용적인 조언들이다.

다소 기술적인 이런 조언 이후엔 글쓰기 전체를 조망하는 도움말이 이어진다. 모든 글쓰기 지침서는 저자의 관점을 포함한다. 그래서 <글쓰기 만보>를 읽으면 안정효의 글 쓰는 방식이나 창작을 대하는 태도 등을 알 수 있다. 때론 직접적인 가르침이 아닌 이런 요소들로부터 더 큰 도움을 얻을 때도 있다. 저자는 창작행위가 온전히 영감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보다는 철저한 준비와 꾸준한 훈련이 완성도 높은 글을 만들어낸다.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영감으로 쓴 글들은 대부분 차후에 비논리적이고 허점이 많은 것으로 드러난다. 재능도 좋지만 노력이 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본래 소설이나 시 쓰기 같은 창작에 대한 도움말을 얻고자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직접 소재를 찾아 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이 나의 능력 밖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책이나 영화로 주어진 소재를 자신만의 느낌으로 풀어내는 것조차 아직은 쉽지 않다. <글쓰기 만보>는 글쓰기에 대한 단순한 조언에서부터 창작자를 위한 심도 깊은 이야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독자가 취미로 글을 ‘끼적거리’든 전문적인 글쓰기를 꿈꾸든 <글쓰기 만보>는 한번 보고 덮어둘게 아니라 두고두고 펼쳐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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