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 / Slumdog Millionaire (2008)

 

예기치 못한 상황과 우연한 사건이 잔뜩 벌어지는 TV 드라마를 ‘막장’이라 부르곤 있지만, 실은 우리의 삶이 더욱 우연에 노출되어 있다. 호르몬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청소년 시기의 어느 날, 저녁때까지 넉넉히 남은 시간에 친구를 초대해 침을 꿀꺽 삼키며 성인 비디오를 트는 순간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는 부모님을 맞이하는 것도 우연, 길가다 스타일 좋고 나보다 키도 한 뼘쯤 더 큰 남자의 팔짱을 낀 채 행복한 표정을 짓는 전 애인을 마주치는 것도 우연, 3주 연속 로또 5등에 당첨되어 기약 없는 일등 당첨을 상상하게 하는 일도 어찌 보면 우연의 산물이다.

근데 이렇게 삶을 지배하는 우연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만 들어가면 맥을 못 춘다. 개연성과 현실감을 들먹이며 퇴출시켜야 하는 못된 녀석이 된다. 그래서 영화 같은 현실, 즉 야구 9회 말 투 아웃에 벌어지는 역전쇼나 주당 수십억을 받는 축구스타의 한번도 놓친 적 없는 페널티 킥 실축 같은 일은 비교적 잘 대접받는 반면, 서로가 없인 죽고 못산다는 커플이 알고 보니 이복남매였더라, 혹은 안 그래도 수없이 갈등을 겪고 겨우 안정된 한 쌍의 남녀가 각각 살해범과 피해자의 자식이었음이 밝혀지는 이야기 등은 이제 웬만큼 포장을 잘 하지 못하면 말 그대로 ‘막장’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가난한 소년이 수십억이 걸린 퀴즈쇼에 나가 거짓말처럼 문제를 맞춰나가면서 알고 보니 그 해답이 전부 그 소년의 인생에 들어있더라는 얘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개는 아마도 소년과 문제 출제자 사이에 모종의 사전협약이 있었거나, 아니면 소년이 놀라운 정신감응능력을 발휘해 이 TV쇼 제작자들의 마음을 미리 읽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니 보일의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퀴즈쇼의 과정과 소년의 인생을 교차로 보여주면서 문제의 정답을 철저히 우연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다. 소년의 삶이 곧 정답의 보고.

 


문제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점. 소설이나 영화가 상상의 산물이기에 더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우연과 필연의 조합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해 매력을 잃는 경우도 더러 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비록 아주 소소한 단면이기는 해도 인도 하층민 생활의 일부를 보여준다는 점, 감독 특유의 질주하는 리듬감과 스타일 넘치는 화면을 구사한다는 측면에서 관객의 눈을 붙드는 매력을 발산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그 구심점에 너무 많은 우연이 개입되어 있어 아무 경계 없이 빠져들기엔 조금 어려운 영화다. 더구나 소년이 정말 원했던 것은 퀴즈쇼에서의 엄청난 상금이 아니라 단지 운명적인 사랑을 다시금 찾는 것이었을 뿐. 이쯤에서 나도 모르게 손발이 오그라들었다고 말한다면 좀 너무한가. 이 로맨틱 소년의 앞날이 장밋빛으로 물들기를 순수하게 바라지 못한 것을 세상을 삐딱하게 보게 된 이 한 관객의 구질구질한 태도 탓이라 해도 딱히 할말은 없다.

근데 말이지, 아카데미 회원들에겐 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가 스토리상의 그 숱한 우연을 다 덮어줄 만큼 감동적이었던 걸까? 세상엔 아직 이토록 로맨티스트가 많나 보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