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단편집 - Night Shift (스티븐 킹)

이번에야 비로소 스티븐 킹의 책을 제대로 읽은 셈이지만, <스티븐 킹 단편집 – Night Shift>를 읽는 내내 마치 그만의 세계를 미리 체험해본 듯한 묘한 기시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아니 확실히 스티븐 킹의 여타 작품들을 이미 숱한 영상매체를 통해 먼저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각색이 원작을 그대로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믿음 아래, 몇 편의 영화를 본 것만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음산하고 축축한 특유의 촉감만은 원본과 복제 모두 공유하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는 있겠다.

그런데 책을 읽고 관련정보를 얻기 위해 검색을 좀 해보니, 내가 느낀 것은 기시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Night Shift>에 수록된 스티븐 킹의 단편 중 몇 편은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벌써 영화로 감상한 작품들이다. 유년의 기억 어디쯤, 어느 토요일 밤에 봤던 이름을 알 수 없는 영화에 <금연 주식회사>와 <벼랑>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전자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고객의 금연을 돕는(?) 어느 엽기적인 금연 회사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그녀의 남편과 아찔한 내기를 벌이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긴 영화는 85년 작이며 제목은 <Cat’s Eye>. 드류 배리모어와 제임스 우즈가 출연했다지만 내 기억엔 제임스 우즈의 얼굴만 남아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 영화는 별로 달갑지 않은 공포로 다가왔고, 그럼에도 결코 눈을 뗄 수 없었다. 한창 <환상 특급> 류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있을 시절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앞의 두 이야기를 포함해 <Night Shift>에는 모두 스무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스티븐 킹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어본 이라면 쉽게 짐작되듯이 각각의 이야기엔 흡혈귀, 괴물, 살인마, 유령, 살아있는 기계 따위의 등장인물(?)들이 나타나 독자를 겁준다. 물론 짤막한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단편집에서 작품간의 편차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즉 어떤 이야기는 그 으스스한 기운을 그대로 전하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그런 애초의 의도가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숱한 끔찍한 이야기(현실은 또 어떻고)에 면역이 된 지금의 독자라면 스티븐 킹이 글을 쓰며 기도했을 서늘한 공포를 좀처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Night Shift>는 스티븐 킹 세계의 진수를 보여줄(거라 믿는, 왜냐하면 아직 읽어보지 못했으니까) 장편으로 진입하기 전, 미리 그것을 간단히 맛볼 수 있는 일종의 시식코너 같은 책이라 여겨진다.

앞서 오래 전에 무심코 본 영화 속 이야기를 이 책에서 발견했다고 말했지만, 좀 더 찾아보니 <Night Shift>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영상매체로 옮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어째서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이토록 많은 영상 창조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일까. 이유로 여러 가지가 꼽힐 수 있겠지만 예술가들의 궁극적인 관심이 밝음보다는 어둠에, 긍정보다는 부정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의 이야기가 가지는 그 음침한 색깔이 무시할 수 없는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인간심리의 심연에 남몰래 숨어있는 호기심과 욕망을 스티븐 킹은 표면으로 드러낸다. 겉보기에 불쾌하지만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진 못한다. 참 고약해도 방법이 없다. 스티븐 킹은 그런 소재를 찾아내 실로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한다.

이렇게 그의 작품세계가 죽음이나 폭력, 또는 전염이라는 암시를 가진, 줄곧 어두운 소재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Night Shift>에는 단순히 호기심의 충족이라는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다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이를테면 유년시절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공유한 남매가 힘든 현실에 밀려 그 소통의 끈을 잃어버렸을 때 맞이하는 상실감을 그린 <사다리의 마지막 단>이나, 스티븐 킹의 가족 이야기(<유혹하는 글쓰기>에 비추어 보건대 그의 어머니 이야기임이 분명한)일 법한 <방 안의 여인> 같은 단편들은 공포의 감정과는 다른 쓸쓸함을 간직하고 있다. 이 소설들은 스티븐 킹을 단지 악취미적인 소재만 찾아 다니는 뻔한 대중소설가라고 여겼던 이들에게도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투병하는 어머니의 고통을 마주한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방 안의 여인>은 그 쓸쓸한 기분을 쉬이 떨쳐버리기 힘든 소설이다.

스티븐 킹의 이야기는 쉽게 잊혀질 듯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영상으로 옮겨지기 매우 쉬운 그 군더더기 없는 모양새만큼이나 소설 속 어느 장면은 마치 영화 속 한 부분처럼 뇌리에 남겨지기도 하고, 이야기 속 엽기적인 캐릭터가 살아있는 그 무엇처럼 기억에 떠오르기도 한다. 참 다행인 것이 활자와 영상을 모두 지배한 이 이야기꾼은 나에겐 아직 미지의 세계다. 아직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모든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단편집 <Night Shift>를 거쳐 그 세계로 진입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스티븐 킹의 시식코너에서 살짝 본 맛이 본래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는 믿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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