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2009)

<JSA 공동경비구역>에 대한 관객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비하면 <복수는 나의 것>은 개봉 후 찬밥 신세나 다름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주위에선 짧은 평들을 대신해 욕설이 흘러나왔다. 분명 그들은 <JSA 공동경비구역>의 속편을 기대했으리라. 반면, 함께 영화를 봤던 친구와 나는 말 없이 극장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충격이었다. 속으론 아마 둘 다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건 ‘작품’이야!

<복수는 나의 것>은 결코 선혈 낭자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마치 한 장의 끔찍한 스냅사진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불쾌하게 옭아매는 영화다. 박찬욱의 절제된 연출 덕분에 모순투성이의 인간사가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게 보는 이를 파고든다.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두 폭력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되고 마는 이 세계.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지는 영화 속 잔인한 배경은 현실의 아이러니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올드보이>는 강력한 한 방이었다. 가장 강렬했던 장면은 대수(최민식)가 영문도 모르는 자살 시도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 바로 그 오프닝컷! 최민식이 햇살을 뒤로 한 채 얼굴의 실루엣만 드러낸 그 장면 하나 때문에 <올드보이>를 몇 번 더 관람했던 기억이 난다. 최민식의 얼굴엔 비극의 소용돌이에 갇힌 영웅의 그것처럼 웅장한 비감이 서려있었다.



<박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박찬욱의 성공적인 전작들을 떠올리는 것은 그만큼 이 영화가 흥미롭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이다. 더없이 헌신적이었던 신부가 피와 섹스를 탐하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소재는 그 자체로 강렬했으나, 완성된 영화 <박쥐>는 생각보다 강렬하지 않다.

물론 송강호의 연기는 언제나처럼 좋다. 라여사를 연기한 김해숙의 카리스마는 영화에 힘을 불어넣는다. 도발적인 매력과 순진한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김옥빈의 표정은 보는 이를 빨아들인다.


그러나 관객 자신이 영화를 따라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상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즐겁게(?) 만들었던 전작들에 비해 <박쥐>에선 기꺼이 따라갈 만한 강력한 이야기 줄기가 보이지 않는다. 보는 이를 갈 곳 없게 만들어버린 영화는 소재가 불러일으켰던 긴장감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그저 윤리적 파격에 대한 단죄와도 같은 맥 빠지는 결말에 도달한다. 자극이 속 시원히 분출되거나 한데 모여 격렬한 인상으로 남지 않은 채, 차가운 배경 속 뜨거운 선혈 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복수는 나의 것>의 냉소적이고 허무한 엔딩이나 <올드보이>의 심장을 두드리는 오프닝은 여기에 없다. 부조리한 폭력을 통해 여전히 인간존재의 모순을 이야기 하고 있는 박찬욱은 <박쥐> 속 폭력과 미술에 도취된 팬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이전 영화 속 잘 조율된 이야기에 빠진 경험이 있는 영화관객들로부터는 왠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듯하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