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 (500) Days Of Summer (2009)

누군가를 사랑… 아니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의 표정이나 습관, 심지어 단점까지도 좋아진다. 그 모든 것이 상대방을 이루는 일부이기 때문이리라. 대상이 되는 그녀는 하나의 완전체. 그녀를 향한 호감이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이루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가 어떤 흠을 가지고 있든 괘념치 않게 된다. 마치 신체기관의 일부처럼 그 단점들이 없다면, 좋아하는 그녀(혹은 그) 역시 존재할 수조차 없으니까. 하나님 부처님, 미천한 저에게 이토록 과분한 여인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잘 믿지 못하는 이유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바로 그 시기 때문에 말이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토록 아름답던 그녀의 표정이 평범한 것으로 절하되더니, 때로는 그것이 급기야 싸움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내 온몸을 휘감았던 열렬한 애정의 에너지는 어느새 식어버리고 마음 안에서 미움이라는 녀석과 지분다툼을 벌이느라 눈코 뜰 새 없다. 시도 때도 없는 다툼. 의도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여유조차 없이 쉽게 뱉어버리는 헤어지자는 그 말. 이별이라는 종착역.


여기 누구나 겪는 애정의 통과의례를 지나치는 한 커플이 있다. 남자의 이름은 탐(조셉 고든-레빗), 여자는 썸머(주이 디샤넬)라 불린다. 첫 눈에 썸머를 좋아하게 된 탐은 그녀 역시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후부터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노래가 절로 나오고 가만 있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직장에선 넘치는 아이디어를 주체할 수 없다. 한 남자의 주위에 찾아온 이 흥미로운 변화. 로맨틱한 어휘에 돋을 닭살을 겁내지 않는 누군가라면 그걸 ‘사랑의 마법’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여느 커플처럼 데이트를 즐기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이전 누구에게도 들켜본 적 없는 경험과 생각들을 서로를 향해 쏟아놓는 두 사람. 그러나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그녀의 점과 무릎의 생김새가 어느 순간 탐의 신경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대화는 시큰둥해지고 예전에 ‘빵’ 터졌던 농담들이 이젠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균열이 시작된 지점은 두 사람의 관계에 ‘커플’의 팻말을 달고 싶었던 탐과 아무 부담 없이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픈 썸머의 상반된 태도가 수면으로 올라온 그때. 이후 몇 번의 다툼과 화해,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터널을 지나 어색함과 차가움만이 남은 지금, ‘사랑’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찾을 길이 없다.

누구의 견해가 옳은 지 장담할 순 없다. 어쩌면 이것이 이별의 진짜 이유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당신과 내가 이뤄질 수 없었던 것은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든 규정지으려던 내 태도나 그것을 기어이 피하려는 당신의 가치관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날 저녁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내가 골랐던, 그러나 당신이 가장 싫어했던 초콜릿 칩이 컵의 맨 위쪽에 얹혀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세계경제만큼이나 수많은 변수들로 가득 찬 이 애정의 세계를 누가 감히 설명해 낼 수 있으랴. 그러나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는 그것에 근접하게 다가가는 데 성공한다. 당신의 인생에서 ‘사랑’은 뭘까. 그것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500일의 썸머>는 아주 평범한, 그러나 놀랍도록 심장을 건드리는 러브스토리다. 아니 그보다는 남녀이야기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이는 이 영화가 완결된 사랑을 다루는 것도 아니요, 흔한 헐리웃 로맨틱 코미디처럼 갈등과 화해를 이야기의 축으로 삼지도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누군가가, 혹은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이미 규정해버린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대한 물음에 <500일의 썸머>가 답하는 방식은, 과거형의 일정한 정의를 끌어와 불변의 진리를 설교하는 식이 아니라 그저 현재진행형인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라는 주문에 불과하다. 너무나도 소박하지만 그 또한 진리다. 우리는 꿈을 좇아 살아가는 길 위에 함께 서있으며, 그리고 드디어 만난다.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고 거기에 우리를 옭아맬 운명 따윈 없음을 증명하는 <500일의 썸머>의 엔딩은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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