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루 기담 (아사다 지로)


때론 영화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원작으로의 탐험이 새롭고 즐거운 발견을 낳기도 한다. 영화 <파이란>은 나를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으로 이끌었고, <철도원>은 이 중년의 일본 작가를 내 뇌리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야기꾼으로 각인시켰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들은 잘 만든 특집드라마를 보듯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엔 지루하도록 깊이 내려가 결국 독자와의 공감의 접점을 잃어버린 자아성찰이나 관념의 철학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 행동이 금새 예측되는 재미없는 캐릭터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사다 지로는 이야기와 주제, 인물 사이의 강약을 제대로 조절해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사고루 기담>엔 제목 그대로 '이상야릇하고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옴니버스 형태로 담겨있다. 각 이야기의 화자들은 어느 고층 펜트하우스에 모인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 그들은 자신만의 비밀이랄 수 있는 은밀하고 기이한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 놓는다.


이야기는 모두 다섯 가지로, 전설적인 도검과 그것을 만든 장인, 그리고 감정가를 둘러싼 미스터리(<대장장이>), 섬찟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먹먹해지는 스토커 스토리(<실전화>),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 엑스트라 검객의 이야기(<엑스트라 신베에>), 개인의 사랑과 행복을 뒤로 하고 평생을 정원과 함께 늙어간 어느 정원사의 인생(<백 년의 정원>), 전설로 추앙 받는 야쿠자의 뒤늦은 자기 고백(<비 오는 밤의 자객>)이 <사고루 기담>에 담겨 있다.

<철도원>에서의 단편들도 그랬지만 <사고루 기담>의 이야기들 역시 하나같이 여운을 남긴다. 만약 어떤 이야기에 있어 마치 칼로 자른 단면처럼 선명한 엔딩을 원하는 사람들에겐 아사다 지로의 끝맺음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의 맺음말은 언제나 독자들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그런 화법이 때론 아련한 슬픔을 남기기도, 어떨 때는 엄습하는 섬뜩함을 던져주기도 한다.

한편 도검이나 사무라이, 야쿠자를 묘사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경험, 그의 집요한 관심사를 보여준다. 그의 책에는 항상, 20대를 야쿠자로 보냈다는 설명이 작가 소개란에 쓰여있다. 일종의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비 오는 밤의 자객> 같은 작품에서 그려진 야쿠자의 모습이 더욱 실감나는 것일 터다. 또한 그의 대표 장편소설이랄 수 있는 <칼에 지다>가 드러내는 것처럼, 일본 사무라이 시대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이 책의 <엑스트라 신베에>에도 담겨 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일본판 '환상특급'을 보는 듯하다.

틈날 때마다 아사다 지로의 책을 몇 권 더 주문해 놓았다. 장편 <칼에 지다>는 물론, <사고루 기담> 같은 단편집인 <가스미초 이야기>,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이 읽어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간결한 구성으로 금세 읽히면서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그의 이야기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