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같아선 피곤에 뻗어 누운 밤 시간, 머리맡에 둔 한 권의 책 내용을 동 트기 전까지 뇌로 자동 전달해 주는 기계를 발명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하루 종일 시달리다 이 고요한 시간만큼은 휴식을 취하고픈 뇌의 고충을 외면하기 어려울뿐더러 마치 인체를 활용한 데이터전송 같은 비인간적인 개념을 떠올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심으론, 뇌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인간의 신체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누군가 그런 기계를 만들어 준다면 잘 써줄 의향은 있다. 물론 구매 시 무이자 할부 6개월을 넘기지 않아도 될 만큼 가격 장벽이 낮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책 읽을 시간, 더 정확히는 그럴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유치한 투정을 해보려다 이런 어이 없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
톨스토이가 민간설화, 종교전설, 구전된 이야기 등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도덕적, 종교적인 우화들을 모아놓은 것이 이 책 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짧은 작품들은 모두 교훈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뚜렷하고, 그 교훈 또한 매우 종교적이며 비세속적인 경우가 많다. 이라는 작품엔 거의 무정부 상태와도 같은 바보 이반의 나라가 등장하는데, 이곳은 군대를 이용한 전쟁도 일어날 수가 없고 상인들이 자본을 무기로 백성을 착취할 수도 없는 매우 비현실적인 곳이다. 이 국가에서 유일하게 칭송되는 것은 노동으로, 왕인 이반조차 정치는 뒷전이고 땅을 일구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손에 흙이 묻지 않는 것은 진정한 노동이 아니며, 머리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려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반의 나라의 중요한..
를 본 것은 고등학생이 다 돼서였다. 어린 시절이라고 하기엔 머리가 너무 컸던 그때에도 사쯔키와 메이, 그리고 세 마리의 토토로가 벌이는 소박하지만 환상적인 이야기에 넋을 놓았다. 지금은 그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으나 사실 그 이전에도 을 꼬박꼬박 챙겨보던 내 모습만은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 외에 그의 손길이 들어간 작품들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받아들이며 성장해온 내 또래 세대들은 그의 이름이 굉장히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지금 현재 대중적인 인지도 면에서 가장 유력한 애니메이션 작가로 미야자키 하야오를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는다. 비록 그의 작품세계에 동화되지 못한 이들이라도 말이다. 나는 지금도 미야자키 하야오, 혹은 지브리의 신작들을 여전히 고대하고 있다. 키리도시 리사쿠의 은 이 애..
의 앞부분에는 ‘허영만 만화창작 30주년 기념 헌정 평론집’이라는 문구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스스로가 밝힌 ‘평론집’에 가깝다기 보다는 만화작가 허영만과 그의 작품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풀어내는 쪽에 가깝다. 위의 문구 바로 밑에는 “이 책을 만화가 허영만과 그의 만화에 바칩니다”라는 문장이 적혀있다. 허영만을 만화사적이나 작품의 사회맥락의 관점에서 파헤치는 시각은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애초에 ‘헌정’이라는 단어로 수식된 작업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가급적 객관적 시각으로 표현되길 원하는(비록 그것이 읽는 이의 헛된 바람일지라도) ‘평론’이라는 단어로는 이 책을 설명하기 힘들다. 예컨대 ‘작가론’이라 분류되어 있는 첫 번째 챕터에서 허영만의 작품 세계를 좀 더 ..
내게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는 아직까지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문학의 중요한 지점들은 온통 백인 중심의 영미, 유럽계 작가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독서량이 많지 않은 나로서는 남미의 작가들까지 챙겨본다는 것이 그리 수월친 않다. 지금 현재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미국, 유럽중심의 철학과 생활패턴임을 상기해볼 때 그 사실은 더욱 그렇다. 몇몇 유명한 작가들을 제외한다면 에콰도르나 칠레, 아르헨티나 등의 작가들을 언제 찾아보고 떠올려 보겠는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은 이렇게 문학적인 미지의 세계(철저히 개인의 부족한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였던 라틴 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칠레 출신의 루이스 세풀베다라는 작가를 나에게 알려준 소설이다. 농부 출신으로 아마존의 수아르 족의 생활터전으로 이민한 ..
추리소설은 언제나 한가지 감상만을 낳는다. 그것은 독자가 등장인물 어디쯤을 방황하다 의혹의 눈길을 둬버린 용의자에 대한 기억이다. 말하자면 밝혀진 범인과 읽는 이가 찍어뒀던 용의자 사이의 차이만이 뚜렷이 남을 뿐이랄까. 그가 범인이었던가? 아니다, 그 사건은 그가 범인이었어. 근데 어떤 사연이 있던 살인사건이었지? 이렇게 추리소설은 우리가 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몇 가지 기억의 갈래 중 하나만을 남겨둔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여운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은 재미있다. 인륜을 거스르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과 미지의 범인을 향한 두근거림, 그리고 실제범인과 상상의 용의자가 일치할 때의 쾌감이 추리소설을 읽는 흥미를 돋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에는 각자의 어두운 사연을 간직한 10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