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영화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원작으로의 탐험이 새롭고 즐거운 발견을 낳기도 한다. 영화 은 나를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으로 이끌었고, 은 이 중년의 일본 작가를 내 뇌리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이야기꾼으로 각인시켰다. 아사다 지로의 단편들은 잘 만든 특집드라마를 보듯 간결하고 명료하다. 그의 짧은 이야기들 속엔 지루하도록 깊이 내려가 결국 독자와의 공감의 접점을 잃어버린 자아성찰이나 관념의 철학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그 행동이 금새 예측되는 재미없는 캐릭터들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사다 지로는 이야기와 주제, 인물 사이의 강약을 제대로 조절해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엔 제목 그대로 '이상야릇하고 재미나는 이야기'들이 옴..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이다. 영화 을 보고 원작을 읽고 싶어 들춰본 책이다. 책 속엔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이 첫 번째로, 의 원작인 가 두 번째 이야기로 실려 있다. 뿐 아니라 도 영화로 먼저 접했다. 한때 히로스에 료코를 참 좋아해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 드라마 등을 보곤 했는데 도 그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 영화 은 그러니까 아사다 지로나 다카쿠라 켄의 이름값 덕분에 본 건 아니었다. 영화를 본지가 오래되어 세밀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역사의 따뜻한 난로 곁에 앉아 흰 눈이 쌓인 철로 주변을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포근한 분위기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전해지는 뭉클한 감정은 영화나 원작소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소설의 장면 장면을 충실히 화면에 담으려 했던 것 같고, 아사다 지로의 문장 또한 머..
제목만 보고는 사진집이 아닐까 생각했다. 설령 글이 있더라도 페이지 안에서 사진의 비율이 훨씬 높은. 생각보다 사진이 그다지 많이 수록되진 않은 ()는 수필집이다. 이 책의 제목은 소설가인 저자가 일상의 한 부분을 글로 포착하는 행위를 카메라가 대상을 담아내는 것에 빗댄 것이다. 물론 지은이가 직접 찍은 것, 혹은 그렇지 않은 이미지 등, 사진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농담하는 카메라’란 진짜 농담을 하는 어떤 놀라운 기계가 아니라 저자 자신을 가리킨다. 잠시 다른 얘기지만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면서 뭔가 선수를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블로그를 몇 달간 방치해두었다가 다시 끼적대기 시작할 때쯤 내 머리를 스친 것이 바로 블로깅이 사진 찍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머..
를 읽다 보면 ‘재’와 ‘잿빛’이라는 단어가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남자와 소년이 걷는 길은 온통 재로 뒤덮여 있고 물에 떠있는 것도, 바람에 날리는 것도 재, 멀리 보이는 건물들의 외양을 묘사할 수 있는 색깔도 오로지 잿빛뿐이다.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독자는 이 세계가 무언가 거대한 사건이 한 차례 휩쓸고 간 폐허와 동의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이 무채색의 공간에서 남자와 소년은 무엇을 위한 생존인지도 모른 채 해변을 찾아 떠난다. 남자는 사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것은 오로지 소년뿐이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과거 이곳에서 인간들이 살았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발길을 옮기는 거리마다 말라 비틀어진 뼈들..
서로 다른 감독들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나 같은 이런 테마소설집들의 장점은 각기 다른 개성들이 모여있는 만큼 그 다양성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작가들간을 비교하거나 그들에 대한 감상자로서의 호부를 피해갈 수 없기도 하다. 여러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좋고 나쁨의 차이. 어떤 것은 버려지고 어떤 것은 선택되는 취사선택의 유혹. 말하자면 이런 형식의 결과물들을 감상하는 것은 많은 창작자들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작가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동시에 거리를 둘 대상을 솎아내는 과정도 동반한다. 에는 모두 9명의 작가들이 써낸 짧은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나이를 가리키는 ‘서른’이라는 숫자를 소재로 탄생된 단편들이다. 각 소설들은 이 소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각기 달라서 어떤 ..
11분이라는 제목이 재미있다. 파울로 코엘료는 일반적으로 섹스에 소요되는 시간을 11분으로 상징화했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데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던 어빙 월리스의 이라는 작품에서 그 기준점을 가져왔다고 한다. 다만 7분이라는 시간이 너무 ‘인색’해 보여 자신은 4분을 더 추가했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둘 다 다소 박해 보이는 숫자이긴 매한가지나, 이 소중한 순간들이 대개 5분여에 그치고 마는 사례들도 허다하니 파울로 코엘료의 기준, 더 나아가 어빙 월리스의 7분조차 너그러워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은 그렇다, 섹스에 관한 얘기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브라질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소녀, 마리아는 누구나 그렇듯 성(性)에 관해 혼란스러운 10대를 거친다. 욕망과 사랑, 그리고 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