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E / Wall-E

영화는 전체 러닝타임의 처음 3분의 1을 이렇다 할 대사 없이 진행한다. 그나마 등장하는 대사는 월리(월-E)와 이브의 통성명 정도로 나머지는 모두 캐릭터의 몸짓과 감정을 표현하는 로봇의 기계음으로 묘사된다. 그 동안 하나의 거대한 쓰레기 덩이가 되어버린 지구의 황량함이 월리를 쓰레기 더미 가운데 한 점으로 보이게 하는 부감시점과 묵시록에 어울릴만한 음악을 통해 드러난다. 생명체라곤 이 쓰레기 처리 로봇을 졸졸 따라다니는 바퀴벌레 한 마리뿐인 이 외로운 지역에 바로 월리의 아지트가 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아이템들을 하나 둘 선반에 진열하는 모습은 로봇 월리를 흡사 희귀품을 수집하는 인간처럼 보이게 한다. 더구나 뮤지컬 속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에 감동하는 월리. 웬만한 인간보다 감상적이다.


줄거리를 둘째로 친다면 3D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재미는 사소한 것을 섬세하게 다룰 때 느껴지는 반가움에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기상 후 태양에너지의 소모로 기력이 떨어져 바퀴의 캐터필러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월리의 모습엔 마치 피로와 숙취로 아침을 힘겹게 맞이하는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 겹쳐진다. 또는 숟가락포크를 주워와 제대로 분류가 되지 않는 듯 망설이다 결국 숟가락과 포크의 사이에 얼렁뚱땅 놓는다든지 하는 장면들, 외로운 지구에 하나뿐인 친구인 바퀴벌레를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들은 월리를 차가운 무기체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내며 캐릭터와 관객간의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월-E>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지구가 종말의 냄새를 풍기며 등장하는 도입부에서부터 바로 여기 월리의 일상을 아무 대사 없이 그려내는 초반부까지다. 오히려 쓸데 없는 대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이 로봇의 외로움과 또 다른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러다 월리가 이브를 만나면서부터 영화는 속도를 탄다. 이제 등장인물들은 외로운 지구를 떠나 광활한 우주로 향한다. 인류가 쓰레기 더미의 지구를 떠나기 위해 띄운 우주선 액시엄에 월리가 도착하면서 <월-E>는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총출동하는 헐리웃 애니메이션 특유의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한참이나 지구를 떠나 있었던, 그래서 이제 걷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신체가 퇴화한 인류의 미래는 이브가 월리로부터 얻게 된 식물을 통해 희망을 갖게 된다. 황무지였던 지구가 다시 생물이 살 수 있는 곳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 것이다. 월리와 이브는 이제 이들의 운명을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영화가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부의 암울했던 지구의 모습과 달리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기 시작하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월-E>는 여느 헐리웃 애니메이션들이 모두 그렇듯 현실적인 문제제기에 집착하는 작품은 아니다. 특히나 픽사의 애니메이션들은 낙관적인 세계관 속에서 따뜻함을 발견하는 데 강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월-E>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월-E>에서는 인류의 희망을 찾는 과정보다 이브에게 첫눈에 반한 월리와 그런 그에게 점점 마음이 동하는 이브, 이 둘의 러브스토리가 이야기의 주축이 된다. 고로 월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뮤지컬 속의 따뜻한 손잡음이 영화의 엔딩에서 현실이 되는 순간 관객의 마음 속엔 이미 미래를 걱정하는 인류 따위는 없어진 지 오래다. 지들이 알아서 잘 살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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