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도착일, 파리 여행 첫째 날: 오르세 미술관, 몽마르트 언덕, 트로카데로 (2011-12-26,27)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서니, 파리에 도착했다는 느낌 때문인지 대도시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내가 맡은 것이라곤, 그저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의 냄새, 공항 내 상점에서 풍기는 방향제의 향기 따위였을 테지만, 그런 냄새들이 섞인 채 내 후각을 자극할 때면, 내 두뇌 어딘가에서 그것은 도시의 냄새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곤 한다.




나는 대도시에 대한 호감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이 그의 어느 소설집 뒤에 남긴 작가의 말에 동의하듯, 나는 '속된 도시'가 좋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다. 방향을 바꿔가며 끝없이 연결된 도로와 우러름을 강요하는 마천루에 매혹을, 자연 그대로가 아닌, 사람 손을 탄 장식처럼 펼쳐진 도심 공원과 복잡한 군집에 스민 익명성에 편안함을 느낀다. 내게 도시는 차갑지만 동시에 아늑하다.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도시, 파리에서 나는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으로 눈에 띄지 않게 머물다 갈 것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며칠간 신세 질 나를 첫째로 맞이하는 것은 대도시의 냄새였다.

파리에서는 민박을 예약해 두었다. 우선 공항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찾아 숙소까지 갈 교통편을 알아봐야 했다. 5일 교통권을 구입하면서 안내원에게 도심으로 향하는 전철을 타는 터미널 위치를 물었다. 계획 없이 출발한 여행이니 도중 어떤 일이 생길 지, 갑자기 어느 곳으로 가고 싶어질지 몰라 파리 5구역까지 이동이 가능한 티켓을 샀다.

전철을 타고 민박집 사장님께서 메일로 미리 보내주신 약도를 참고하여 이제부터 며칠간 묵게 될 곳에 도착했다. 숙소는 한적한 동네의 단독주택이었다. 지하철 역에서 내리면 주택가를 10여분 걸어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민박집에 다다르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스태프가 안내를 해줘 예약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생각보다, 오기 전 참고 삼아 보았던 사진보다 작아 보였다. 길쭉한 모양의 방 안에 내 신체 사이즈에 맞춰 제작한 듯한 작은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고, 침대를 벗어나면 겨우 몸을 움직일 공간이 있었다. 옷가지며 소지품을 얹어 놓을 수 있는 작은 탁자가 그 작은 공간을 더 복잡하게 만들며 침대 옆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잠만 자야겠다는 다짐이 절로 드는 공간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면, 민박은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가격에 비해 만족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비좁은 공간도 그랬지만, 특히 객실을 늘리기 위해 내부 개조를 무리하게 해서인지, 각 객실 간의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 불편했다. 층이 다른 방으로부터도 음악과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정도였는데, 낮 동안 발을 혹사시키고 돌아와 아늑한 저녁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객에게 달가운 환경은 아닐 것이다. 불편함을 느끼다가도, 다른 객실의 사람들은 모두 편안하게 지내는데 나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어 억지로 잠에 들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

다음에 파리를 들른다면 민박이 아닌 저렴한 현지 호텔을 숙소로 삼으리라. 굳이 한식을 고집하지 않아도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는 혀와 위장을 가지고 있으니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없더라도 아쉬울 것이 없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기기괴괴한 음식만 아니라면, 웬만한 것을 섭취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는 튼튼한 위장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비위가 좋지 않아 우유만 마셔도 속을 뒤집곤 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비위가 좋아지거나 입맛이 바뀌는 것도 참 불가사의하다.


다음날 아침. 파리를 돌아볼 첫째 날이다. 새벽부터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이날은 여행사를 통해 가이드가 인솔하는 단체 관광 코스를 예약했다. 스스로 이것저것 검색할 필요 없이 가이드만 졸졸 따라다닐 예정이었다. 임의로 모인 십여 명의 사람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여행사에서 마련한 코스를 함께 도는 거였다.

모임 시간이 민박집 아침 식사 시간과 맞지 않아 숙소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나왔는데, 모임장소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베이컨을 곁들인 계란과 커피로 간단한 요기를 하였다. 음식은 대단치 않았지만, 낯선 도시에서 어스름한 새벽을 마주보고 먹고 있자니 그 분위기가 새로웠다. 창밖의 풍경이 편안하면서도 묘하게 설렜다.

아침을 먹은 후 어둠을 밀어내고 햇빛이 고개를 들 무렵 모임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나 말고 다른 관광객들로는 커플들, 친구들, 그리고 나처럼 혼자인 사람들이 있었다. 가이드 몇 명이 그룹을 나눠 각각 한 그룹 씩 인솔해 출발했다. 같은 코스를 그룹별로 출발점을 달리하여 돌기로 한 모양이었다. 우리의 인솔자는 20대 후반처럼 보이는 씩씩한 여자 가이드였다. 오늘 우리가 돌 코스는 오르세 미술관(Musée d'Orsay), 파사쥬(Passage), 몽마르트 언덕(Montmartre), 샤크레쾨르 성당(Sacré-Cœur Basilica), 화가들의 생가,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트로카데로(Trocadéro)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지하철을 타고 첫 번째 장소인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미술관 앞은 사람 구경을 원 없이 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부지런한 여행객들이 이리 많다니. 게으른 자는 여행의 자격이 없는 것일까. 표를 사기 위해 선 사람들의 줄이 구불구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 근처 카페에서 오르세 미술관 안에 전시된 미술작품들에 대한 가이드의 간단한 소개가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 커피를 시키고 나자, 가이드는 설명을 시작했다. 화풍 별 화가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언급한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중간중간 아이패드를 사용해 보여주는 식이었다. 가이드 분이 참 열심이구나 싶었다. 그림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반가운 설명이었지만, 그 설명을 듣는다고 미술작품을 보는 눈이 열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풍부한 즐거움을 만끽하는 여행은 관심과 공부를 필요로 한다. 여유 있는 사회란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을 장려하고 권유할 것이다. 인생의 즐거움을 판단할 척도는, 남들보다 몇 백 만원을 더 버는 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을 보면서도 남들보다 얼마나 더 많은 것을 느끼느냐에 있을 것이다. 나도 물질적 풍요를 숭상하는 자본주의 속 톱니바퀴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공허한 경쟁심리에 시야를 뺏긴 채 세상 도처에 있는 아름다운 것, 재미있는 것과 온전히 마주칠 사이도 없이 인생을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이드 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 설명과는 상관없이, 나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 왔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 하는 질문을 떠올렸다.

카페에서 미술사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긴 시간 동안 줄을 선 끝에 미술관에 발을 들였다. 입장객의 짐을 검사하는 검색대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중앙에 넓은 복도가 있고 좌우로 큼지막한 공간들이 칸칸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술관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카메라를 비롯한 소지품을 입구 쪽 보관처에 맡기고 들어가야 했다. 나중에 오르세 미술관을 다녀온 사람들의 관람기들을 보니 다들 요령껏 사진을 찍는 모양이었다. 고지식한 나는 찍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카메라를 백팩과 함께 입구에 맡겨놓고 입장했다.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감상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공간에서, 그 동안 책이나 인터넷으로만 접했던, 그리고 입장 전에 작은 아이패드 화면을 통해 속성으로 보았던 그림들을 실물로 보는 기분이란...

별 감흥이 없었다...

미술관 내부를 걷는 시간에 비례해 몰려드는 피로와, 살아온 시간을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볼 수 밖에 없는 예술에 대한 무지로 인해 미술관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즐거움을 가질 수 없었다.

예술을 감상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작품과 관계된 주변 지식을 전혀 모른 채, 예술품이 주는 온전한 느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상하는 법과, 작품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기록, 즉 그 배경지식을 이해하며 작품을 바라보는 것. 후자의 방식으로 감상하긴 이미 글렀으니 전자의 방식과 태도로나마 미술작품을 보고자 했으나 의미 있는 즐거움을 느끼진 못했다. 어느 쪽으로든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전제되어야 할 터인데, 안타깝게도 나는 미술작품들에 대한 그 호기심을 내 생애 어느 한 순간에 묻어 놓은 채, 뒤돌아보지 않고 그로부터 이만큼 떠나온 것 같다.

예술작품에 몰입하지 못했더라도 미술관 안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는 흥미로웠다.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었고 사람 구경도 지루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행 후의 느낌을 글로 풀어내자니, 미술관이라는 공간 전체를 말의 그물로 훑어 잡아챈 몇 가지 단어들이나마 그때 저장해 놓았어야 했다는 후회를 한다. 오르세 미술관과 연관된 정보를 좀 더 알아두었거나, 유럽 미술사에 대한, 혹은 관심 있는 화가에 대한 개관이나 에피소드들을 몇 가지 간직하고 있었으면 그 순간이 더 즐거웠을 텐데. 나는 관람 대상을 잘못 정한 주의력 없는 여행자였거나, 준비되지 않은 여행자가 분명했다. 무거운 자책은 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장소에서 마땅히 느낄만한 즐거움을 가차없이 버린 셈이 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무성의한 관람이나마 무사히 마치고 다음 장소인 파사쥬로 이동했다.




파사쥬는 작은 가게들, 간식거리를 파는 제과점 등이 모여있는 보행자 거리였다. 좁은 골목이 기다랗게 이어져 있었는데, 상점들은 골목의 좌우에 포진된 작은 공간들을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골목 안에서, 여행객들은 저마다 좋은 배경이 될 만한 곳을 골라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그 사진들은 듬성듬성 남을 것이 분명한, 불완전한 여행의 기억을 기능 좋게 보완해 줄 것이다. 그것들은 나중에 이곳에 다녀갔다는 증표로도 활용될 터였다. 나도 사진을 몇 장 남겼으나 그 안에 나를 두진 않았다. 그러니 그 사진은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표식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다만 나중에 스스로 이때를 회상할 때 기억에 도움이 될까 하여 찍어두었다. 좋은 기억을 잡아두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사진에 스며들고, 그 기억은 한 장소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 중, 흔들리지 않고 구도가 잘 잡힌 한 장의 사진으로 윤색될 것이다.

가이드는 유머를 섞어가며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주려 노력 중이었다.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대할 수 밖에 없는 가이드답게 성격도 좋아 보이고 말도 잘 하는 분이었는데, 어디를 가든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도 잘 해 주어 편했다.

오전이 이렇게 금새 지났다. 어디에선가 점심을 빠르게 때우고(아마도 샌드위치로 배를 채웠던 것 같다.), 아직 한 낮의 이른 시간인데도 흐린 날씨에 점점 어두워지는 공간을 실감하며 우리는 몽마르트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의 위쪽에는 샤크레쾨르 성당이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과 접한, 경사가 진 계단 위에서 언덕 아래를 쳐다보니 사방이 뿌옇게 변해 있었다. 파리에서의 여행 첫날, 찡그린 얼굴을 한 도시가 우리를 맞이한 셈이었는데, 그 도시의 표정이 신비한 느낌도 있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성당 안을 돌아보고 나오니 차가워진 공기가 피부를 때렸다. 따뜻한 곳에 있다 밖에 나와서인지 온기가 남아있는 것도 잠시, 곧 한기가 소매 안쪽으로 들어와 온기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빼앗아갔다.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마침 가이드가 추천하길래 노점상에서 파는 뱅쇼(vin chaud)를 한 잔 샀다. 와인에 설탕이나 계피 등을 넣어 달짝지근한 맛으로 끓여낸 뱅쇼를 한 두 모금 마시니 뱃속에서부터 퍼지는 온기가 성당 주위의 차가운 공기를 몰아내는 듯했다. 가이드는 한 술 더 떠 내려가는 길 중간에 있는, 바게뜨를 맛있게 만드는 가게를 골라 열 댓 명이 조금씩 뜯어먹을 수 있을 만큼의 바게뜨를 사와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는데, 속은 뱅쇼로 데워지고, 허기는 바게뜨 조각으로 조금 물러가서인지 몸과 마음이 따뜻했다.




언덕을 내려오며 화가들의 생가도 몇몇 보았다. 미술관과 박물관, 예술가들의 생가까지, 유럽의 미술사, 예술사에 관심 있는 관광객들에겐 파리는 온갖 보물이 숨어있는 도시일 것이다. 다음에 이곳에 다시 들르면, 나는 그 보물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지하철 역에 도착하니, 몽마르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어두워진 대기는 이제 밝은 기운이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마지막 코스는 트로카데로였다. 어두워진 시간에다 날씨는 여전히 뿌연 대기를 머금고 있어서 트로카데로에서 으레 잘 보였어야 할 에펠탑이 마치 습기 찬 유리창 너머로부터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파리의 상징인 조형물이 비추는 빛은 나 같은 여행자로 하여금 파리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트로카데로를 끝으로 이날의 파리 유람은 모두 끝났다. 트로카데로는 날씨가 좋은 날, 낮과 밤, 각각 한 번씩 더 오면 좋을 것 같았다. 날씨의 상태와 빛의 유무에 따라 여기에서 보는 파리 시내와 에펠탑의 풍경은 각기 다를 것이다.




가이드도 좋았고 여행사가 알아서 짜준 코스에도 큰 불만은 없었지만, 이날의 단체관광에 한가지 아쉬움은 있었다. 많은 관광지를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열심히 구겨 넣은 듯한 느낌이 그것이었다. 가이드들은 어느 곳에 도착하건 남는 건 사진 뿐이라며 열심히 사진을 찍으라 장려하던 직업인들이었고, 또 어쩌면 그것이 대다수 여행객들이 원하는 바인지도 몰랐다. 이런 여행법은 맘에 드는 한곳에 오래 머물며 주변 경관과 사람들을 천천히 보고 싶었던 나와는 잘 맞지 않는 것이었으리라. 여행지에 머물 시간이 얼마 없어 파리를 다녀갔다는 표식을 빨리 남겨야 하는 여행객이라면 더없이 어울릴 코스였지만, 시간을 두둑이 챙겨온 내가 택할만한 선택지는 아니었다. 이튿날부터는 나 혼자 느긋하게 파리 시를 돌아다녀야겠다,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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