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눈물젖은 라면 - 우아한 세계 (2007)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의 의중이야 일개 관객으로서 알 길이 없겠지만 “우아한 세계”는 마치 1997년 같은 해에 태어났던 “초록물고기”의 판수, “넘버3”의 조필이 이후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 어떨까라는 상상력에서 태어난 듯한 영화다. 이 두 영화 이후 송강호라는 배우가 조폭이라는 한정된 카테고리에 묶이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도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10여년 동안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 냈고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출발점과도 같은 조폭의 신분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픈 코메디쇼같은 짧은 콩트들의 연결에 지나지 않는 영화들이 조폭영화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등장해 온 한국 영화계에서 조직폭력배를 소재로 채택한다는 것은 분명 일정한 핸디캡을 가지고 시작하는 시합과 같다. 이제 관객들은 개연성 없이 터져나오는 욕설대사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 되었으며 나날이 잔인해지는 폭력신에도 염증을 느끼기 일보직전이다. 그동안 욕설이든 폭력이든 항상 더 높은 수위를 자랑해온 헐리웃이 이제는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등을 앞세워 순수한 척 하고 있을 때, 몇 안되는 한국 영화들은 소재가 빈곤해 질 때마다 자극적일 수밖에 없는 조직폭력배를 영화에 출연시켜 왔으니 관객들의 이 같은 거부반응은 어느정도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든지간에 조폭영화들에 대한 선입견은 완성도가 높은, 잘 만든 조폭영화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즉, 조직폭력배라는 소재를 이용해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어도 그 영화는 조폭영화라는 한국영화 특유의 장르의 카테고리 안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한재림의 “우아한 세계”는 아마도 이런 선입견의 피해를 받는 영화 중 하나일 것이다.

“우아한 세계”는 엄밀히 말하면 조폭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어깨가 축 늘어지고 등골이 휜 우리시대의 아버지에 대한 영화이다. 가족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고 저녁 늦게 들어와서는 혼자 차린 라면냄비를 끄적끄적대야 하는 가장들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인 한재림은 그 이야기를 중견조폭 강인구의 사연으로 압축해 보여줬을 뿐이다. 그것도 꽤 훌륭하게.

이 영화가 조폭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보자. 주인공 강인구에게는 직장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가로채려 하는 입사동기 상사가 있고, 믿었던 사장은 그 상사의 친인척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인구의 편을 들 수가 없다. 집에는 아버지의 직업을 창피해 하고, 유학을 보내달라 떼쓰는 딸내미와 무능한 경제력을 문제삼는 부인이 있다. 피터지게 노력해서 모든 걸 안정되게 바꿔놓으면 이제 인구를 기다리는 것은 당뇨뿐이다. 아마도 한재림은 이런 충분히 주위에 있을법한 삶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공적을 가로채는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노려온 보스의 동생을 강인구가 납치하고부터 일어나는 차마 웃을 수 없는 해프닝은 이 영화의 백미다. 순조롭게 해결하려는 강인구의 의지와는 다르게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영화의 전반부는 약간 지루한 감이 있지만 이 후반부의 전개에는 데뷔작 “연애의 목적”에서도 볼 수 있었던 한재림 특유의 유머가 아주 잘 녹아들어있다.

그러나 귀여운 결말을 보여준 “연애의 목적”과는 다르게 “우아한 세계”의 마지막은 그리 우아하지 않다. 두 자식과 아내를 모두 해외로 보낸 기러기 아빠 강인구는 비디오를 통해 가족들을 보며 라면을 먹다 문득 울음을 터뜨린다. 주인공 강인구는 올해 10만명으로 추산된다는 현실의 기러기 아빠들중 누군가 일 수도 있는 것이다. 목소리마저 울릴 정도로 큰 집에 홀로 앉아 눈물 섞인 라면을 치우는 강인구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 이미지출처
www.movist.com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