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초등학생 코이치의 엄마는 아들이 고이 모셔 가져온 이 이상한 물체를 보고 기겁을 한다. 징그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깨진 바위틈에서 코이치가 뿌려주는 수돗물로 몸을 축이며 생기를 회복한 한 마리 괴생물체는 이렇게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에도 시대에 태어나 지진으로 흙 속에 갇혀 긴 시간을 숨죽인 채 기다려온 갓파. 코이치는 나름대로 귀엽게 생긴 이 생명체에게 ‘쿠우’라는 이름을 붙인다. 쿠우는 생명의 은인 코이치, 갓파의 출현에 흥분해버린 아버지, 징그럽다면서도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먹이를 날라다 주는 엄마, 그리고 한창 귀여움을 독차지해야 할 나이에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르는 못생긴 요괴에게 자리를 빼앗겨 심통이 나버린 여동생 히토미 들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이들 앞에는 과연 어떤 일들이 ..
역시 화두는 이야기와 테크놀로지다. 때론 취향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부실한 이야기와 뛰어난 비주얼의 기묘한 비례관계를 너그러이 인정하는 관객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은 것에 놀라곤 한다.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 자체의 반짝임에 몰두할 것인지, 아니면 스크린에 펼쳐지는 문학적 서술에 주목할 것인지는 어차피 관객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이 둘이 보기 좋게 결합하기를 바라는 관객들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엔 여전히 의문이다. 영화를 철저히 상업적 측면에서 바라보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이 정도면 만족한다는 ‘긍정의 태도’로 여겨지기에 앞서, 보다 나은 상품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유독 최근의 영화들 중에서 어느 한 요소, 특히 영화의 비주얼이나 테크놀로지에 집착하는 태..
우연히 만난다면 분홍빛의 말랑말랑한 코를 한번 만져 봐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 레미(패튼 오스왈트)는 타고난 후각을 가진 쥐이자 천부적인 요리사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동료 쥐들이 발견한 음식 쓰레기들에 쥐약이 들어있는지 아닌지 감별하는 데 쓰일 뿐이다. 어느 날 이 조그만 녀석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 구스토에 숨어들어가 요리사의 꿈을 키운다. 물론 자신을 보고 기겁을 할 사람들에 대비해 링귀니(루 로마노)라는 청년을 앞세운 채. 요리에 소질이 없는 링귀니는 어머니의 유언에 의해 파리의 유명 레스토랑에 청소부로 들어가지만 레미의 도움을 받아 우연히 맛 좋은 스프를 만들게 되고, 죽은 구스토의 뒤를 이어 식당을 물려받으려 했던 수석 주방장 스키너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그를 못 마..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말고 생긴 대로 당당하게 살아라!’가 어린이 관객들을 위한 ‘슈렉 시리즈’의 기본 모토이긴 해도, 성인 관객들을 혹하게 만든 이 녹색 괴물의 매력을 설교조의 교훈에 묻히게 만드는 건 이 시리즈에 대한 기만이다. 적어도 머리 큰 팬들은 그런 고리타분한 메시지가 아니라, 낡은 것을 패러디하고 기대되는 것의 전복을 꾀하는 ‘슈렉’의 기발함에 더 집중할 테니까. 동화 속의 들러리들을 주인공을 위시한 주요 등장인물로 앉혀놓고 과거의 찬란했던 주인공들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그 발상의 전환. 그게 어른들이 이 ‘깜찍한’ 녹색 커플의 모험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러나 뭐든지 두어 번 뒤집고 나면 결국 눈앞에 있는 건 제자리로 돌아온 원본이다. 아니면 더 이상 뒤집을 구석이 남아 있지 ..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그래서 누구든 파스텔톤으로 포장된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쯤은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은 냉정하게 돌아볼 때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공통의 성장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더 뽀얗고, 더 희미하고, 더 아련하다. 누군가 그건 추억자체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어린(젊은) 자신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이라 설명했다. 그런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투영한 『초속5센티미터』는 별다른 내러티브도, 눈에 띄는 캐릭터도 보이지 않는 낯선 애니메이션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멀어지게 된 다카키와 아카리의 사이에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초속5센티미터』에선 헤어진 행위 자체보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그리운 감정이 더 중요하다. 다카키와..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녁반찬을 걱정하던 엄마는 마침내 굳은 결심을 한 듯 팔을 걷어붙인다. 지난주와 그저께 모두 카레를 먹었는데, 오늘은 무얼 만드실까? “오늘이야말로... 카레로 한다!!” 입맛까지 다시면서 색다른 메뉴를 기다린 딸 노노코의 기대는 여지없이 사라진다. 아들 노보루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모처럼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던 아빠는, 익숙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에 금세 긴장하여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고 만다. 온가족이 함께 간 쇼핑몰에 노노코를 두고 온 것을 깨닫고 모두들 걱정하고 있을 때, 노노코는 정작 자신이 아닌 가족들이 미아가 되었다면서 태연자약하다. 음, 뭔가 느낌이 오질 않는다고? 그건 아마 나의 표현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일 게다.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