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각기 개성이 다른 선수들이 대회우승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한자리에 모인다. 혹독한 훈련과정, 선수들간의 감정대립, 시스템 안에서 드러나는 불합리, 이 모든 역경을 외치고 드디어 마지막 결전의 순간에 다다른 주인공들. 최종 경기는 이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지금까지 거쳐왔던 수많은 장애물들이 부상, 역전, 승리, 패배, 좌절, 환희 같은 감정과 단어들에 깃들어 이 마지막 경기를 수식한다. 마치 코 끝이 찡해오듯 강렬하게 농축된 이 인생의 축소판. 누군가가 승리하면 다른 누군가는 패배하는 결코 따뜻하지 않은 결과의 이분법.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불리는 실제 스포츠경기보다 더 강한 인상을 주는 스포츠영화는 매우 드물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긴장감과 한 순간의 차이로 결정되는 긴박한 승부를 완벽하게 짜인 각본 속에서 연출되는 영화가 그대로 재현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더욱이 대부분의 관객들이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소재를 사용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같은 경우 그런 면에서 더욱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생순>은 핸드볼 경기 자체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도 물론 스포츠영화라면 으레 기대되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화면이 존재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의 예선과 결선과정을 대부분 생략함으로써 영화가 애초에 그런 장면들만으로 이루어진 스포츠중계영화를 만들 의사가 없었음을 드러낸다. 그 대신에 영화는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내지만 핸드볼국가대표가 뛸 마땅한 팀조차 없는 국내사정의 열악함 속에서 삶의 무게에 치이는 선수들의 모습에 더욱 주목한다. 한국이라는 지역 안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는 꽤 특수한 계층에 속한 이들이 겪는 어려움 또한 우리주변의 모습들과 적잖이 연결된다.

특히 남편의 사업실패로 빚더미에 허덕여 핸드볼을 통해 삶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미숙(문소리)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감독이 그린 고된 인생 속의 인간군상들과 겹쳐 보인다. 여기에 겉으론 명랑해 보여도 선수시절 생리를 조절하기 위해 복용한 호르몬제의 영향으로 불임의 고통을 겪는 정란(김지영), 과거 라이벌 미숙에 밀려 언제나 이인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던 혜경(김정은)의 모습까지, <우생순>은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의 삶 안에 관객에게 전달할 페이소스를 충분히 간직한 채 그들의 인생이 결코 잘 던진 공 하나로 해결될 만큼 화려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히려 치열한 투쟁 뒤에도 눈물만이 남는 그 처절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관객은 감동하지만 금새 잊힐 이 급조된 감정의 순간보다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빚에 허덕일 미숙의 현실을 깨닫는 순간이 <우생순>의 진짜 결말이다.

 

 

언제나 자신의 영화와 관객과의 거리가 좁혀지길 원했다던 임순례 감독은 흥행에 성공한 <우생순>으로 그 바람을 완벽하게 실현시켰다. 이것은 좀더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움직임, 적절한 타이밍에 흘러나오는 감동적인 음악, 캐릭터를 십분 활용한 코미디 장면 등 감독이 자신의 전작들에 비해 보다 대중친화적인 화법을 구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때문에 관습적인 느낌의 순간들도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를테면 마지막 결승전에서 승필(엄태웅)의 입을 통해 듣는 영화의 제목은 조금은 간지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 전반에 걸쳐 인물의 성격을 잘 표현해낸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의 슬픔을 담은 카메라의 시선은 영화에의 몰입을 돕기에 부족함이 없다.

영화가 끝나면 <우생순>의 실제 모델격인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선수들과 감독의 인터뷰가 크레딧과 함께 등장한다. 비인기종목의 설움과 잘 싸워준 선수동료들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하는 이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실 영화 자체보다 더욱 뭉클하다. <우생순>에서 씁쓸한 순간이 있다면 이들에 대한 감동의 눈길이 현실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값싸게 소비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 때이다. 그런 느낌은 스스로를 비인기종목에 대한 무관심에 동참해온 한 사람으로 자각하면서 더욱 강해진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핸드볼경기 자체에 열광한 것이 아니라 올림픽이라는 이름이 빚어내는 국가간의 경쟁심에 자극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국내사정와 국제대회의 차이를 가르는 중대한 지점임이 분명하다.

<우생순>이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는 해에 개봉된 만큼 영화메시지의 진정성 뒤에 그 상업적 의도 또한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단순히 노력의 가치나 승리의 환희, 혹은 패배의 슬픔만을 형상화한 여타 스포츠영화들과 달리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쯤이면 애국심이라는 허울을 벗고, 그 이름의 무게를 잊은 채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들이 흘린 땀에 순수하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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