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 (2007) - 이 맛 저 맛 다 보려다 놓친 맛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름 있는 원작을 영화로 옮기기란 얼마나 부담스럽고 고민스런 일일까. 그것도 무척 두터운 팬층을 보유한 작가의 그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그 어려움의 무게를 실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쯤은 안다. 우리는 그저 7~8000원을 지불하고 두 시간 안팎의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주변인들과 ‘재밌다, 재미없다’의 두 마디를 지껄이거나, 이렇게 글을 끼적이거나, 두 행위 중 하나로 그 두 시간에 대한 평가를 종료할 테니까. 그들이 느낄 중압감이나 부담감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 냉정한 그 녀석이 관객이라는 캐릭터다.



앞의 얘기는 결국, 이런 글을 쓰게 돼서 유감이(미안하)다, 라는 표현을 에둘러 한 거다. 영화 <식객>에서 매력적인 구석을 찾아내기가 힘들었기에 하는 말이다. 어쩌면 다른 어떤 영화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강했는지 모른다. 같은 원작자를 둔 다른 영화 <타짜>가 높은 영화적 완성도와 풍부한 재미로 ‘허영만 원작 영화’라는 보이지 않는 부제의 기대치를 부쩍 높여놓은 지금,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두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아, <타짜>는 ‘정말’ 괜찮은 영화였는데.


때는 오년 전. 뼈대 있는 식당 운암정의 후계자를 가리기 위해 두 사람이 ‘황복’을 재료로 음식을 내온다. 한 사람은 당시 운암정의 주인인 만식(김진태)의 손자 봉주(임원희), 그리고 그 상대는 어릴 적 만식이 데려온 성찬(김강우)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력을 검증하기로 했던 심사위원들이 성찬의 요리를 먹은 후 모두 쓰러지고 만다. 재료인 ‘황복’의 독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것. 이 사건으로 성찬은 운암정을 나오고 식당은 봉주의 차지가 된다. 때는 다시 현재. 채소 장사를 하는 성찬에게 방송사 국장(박진영)과 VJ 진수(이하나)가 찾아온다. 조선말기 최고의 요리사였던 대령숙수의 칼이 일본으로부터 건너와, 그것을 놓고 벌이는 요리대회에 그를 참가시키기 위해서다. 더 이상 요리에 미련이 없는 성찬은 거듭 거절하지만, 오만한 봉주의 태도를 보고 결국 다시 칼을 잡는데...

요리사든 운동선수든 영화 속 두 라이벌의 대결은 결국 끝이 보이는 구도다. 결론은 둘 중 한명(팀)이 이기는 것으로 마무리 될 터이고, 주인공이 이기든 그 상대가 이기든 통쾌한 승리와 아쉽지만 큰 희망 중 하나의 선을 따라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결말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이 영화에서 따로 준비한 메뉴는 무엇일까. 첫 번째 메뉴는 두 주인공의 과거(5년 전에서부터 조상에까지 이르는)에 얽힌 미스터리(?)이고, 두 번째 메뉴는 감초 캐릭터들을 활용한 코미디이며, 세 번째 메뉴는 눈물샘을 자극할 감동의 코드다. 마지막 메뉴는 당연하게도 요리영화답게 화려한 음식들과 그 조리과정의 기록인데, <식객>은 이 네 가지 재료의 맛을 어떻게 버무렸을까.

첫 번째 맛. 두 사람의 과거사의 경우, 영화가 과거와 현재의 시간대를 넘나들며 궁금증을 유발하는 형식을 취하곤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진행과정을 관객이 미리 알아 챌 수 있을 정도로 그 층이 얇다. 그것의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게 나뉘어 있는 캐릭터 설정 때문일 것이다. 성찬을 중심으로 한 선인, 그리고 봉주를 위시한 악인, <식객>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 둘 중 하나로 분류해낼 수 있다(코미디를 담당한 캐릭터의 경우엔 좀 다르지만). 그래서 영화의 줄기를 이루는 사건의 추이를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은데, 예를 들어 운암정에서의 일을 비롯해 조상에 얽힌 오해와 그 진실은 관객이 선한 인물들을 믿기만 한다면 모두 해결될 일이다. 고로 이 이야기설정이 제 몫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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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맛. 양대 구도의 두 주인공의 보조로는 모두 코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성찬에게는 동네 선배인 호성(정은표)이, 봉주에게는 우중거(김상호)가 있다. 이 두 캐릭터는 철저히  관객을 웃길 임무를 부여받은 인물들인데, 문제는 이게 전혀 먹히지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의 코미디 형식이 아무리 파편화되어 서로 연결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하더라도(또는 연결될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코미디 쇼가 아닌 영화에서까지 이런 방식을 경험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두사부일체>나 <가문의> 시리즈를 보라). <식객>에서 웃기기 위한 장면들은 철저히 따로 놀고 있는데, 예컨대 영화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는 ‘반합라면 에피소드(?)’의 경우 너무나 생뚱맞아서 이 장면들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세 번째 맛. 결과적으로 <식객>에서의 감동의 재료는 맛이 없다. 최고의 숯불장이 성일(안길강)의 에피소드도 그렇고, 성찬이 동생처럼 돌보던 소를 재료로 쓰기 위해 도살하는 장면도 지나치게 신파조라 감성의 흐름이 역행한다. 특히 후자는, 영화 내내 살아있는 황복(도마에서 처음 만나 동생처럼 돌볼 새도 없었음이 분명한)을 잘도 썰어내고, 벗겨내고, 저며내던, 주인공이 새삼 슬퍼하는 표정이나, 소를 의인화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장면 등이 너무 상투적이어서, 어떤 감동을 이끌어 내기엔 역부족이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던 가족같은 소라도 그렇지, 이 녀석이 등장할 땐 동물의 예우(?)를, 황복이 등장할 땐 가차없는 칼질을 하다니. 억지라고? 눈물 흘리는 소를 보면 그런 얘기는 안 나올 거다.

 


마지막 맛, 즉 요리를 하는 과정과 음식의 완성을 잡아낸 장면들은, 혹시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을 가장 신경 쓰느라 앞의 요소들을 전부 무시해버렸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꽤 먹음직하다. 그러나 영화의 단점이라서가 아니라 이것으로부터 한 가지 우려되는 사항은, <식객>은 음식을 먹을 때 ‘재료의 싱싱함’에 주목하는 관객이 아니라면 꽤 보기 어려운 영화라는 거다. 영화에선 앞서 말했듯 살아있는 황복의 ‘희생(NG까지 포함한다면 눈물이 앞을 가릴)’이 여러 번 등장하고, 식탁에 나오기 전, 정육점에서나 걸려 있을 쇠고기 덩어리의 부분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는데, 혹시 음식을 먹을 때 온전히 조리된 것들에서만 매력을 느끼는 관객이라면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러나 이 영화가 ‘수많은’ 단점과 ‘소소한’ 장점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것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배치하느냐에 따라 <식객>은 분명 괜찮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맛을 잘 버무리지 못한 것은 결국 어설픈 연출과 편집의 실수다. 여기서 <디워>의 악몽을 떠올리는 것이 시기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두 영화가 한 가지 공유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얼기설기 잘려나가 제대로 물리지 않는 편집점들이다. <디워>에 비해 적어도 초반까지는 매끄럽게 진행되던 <식객>이 갑자기 뭉텅 뭉텅 잘려나간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영화가 위에 언급한 여러 요소들을 짧은 러닝타임에 쑤셔 넣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긴장감이 있어야 할 곳에 코미디가 등장하고, 슬픔이 있는 곳에 또 코미디가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은 어떠한 준비운동(?) 없이 현장에 바로 투입되어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며, 영화가 배치해 놓은 많은 이야기들은 그 촘촘함을 보여줄 새도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한편으론 영화의 편집 전 러닝타임이 예상 외로 길어져,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되도록 도와줄 장면들도 모두 잘려나간 느낌이다. 한마디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들의 나열이다.


결국 <식객>은 두 시간의 한계(限界)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맛을 보여주려다가 결국 아무 맛도 풍기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영화 <식객>은 ‘허영만’이라는 이름에 모든 것을 걸었거나, ‘회’를 비롯한 날 음식을 좋아하는 관객들, 그리고 영화의 편집이 어떻든 연출이 어떻든 이야기가 어떻든 단 두 번만 웃겨주면 그 것으로 영화의 본전은 찾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그렇지 않고, 날 것을 싫어하거나, 영화의 흐름을 깨는 장면들을 혐오하거나, 원작은커녕 ‘허영만’에도 별 관심이 없이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에겐 영화 <식객>이 가히 밍밍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영화의 맛의 좋고 나쁨이 결국 탄탄한 이야기와 매끄러운 구성, 그리고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긴장감을 재료로 하고 있다면, <식객>은 이 맛 저 맛 다 보려다 정작 영화의 맛을 놓친 셈이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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