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cko / 시코 (2007) - 민주주의라는 도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 우리나라의 대선후보 중 하나를 선택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미국의 차기정권을 차지할 것이 유력해 보이는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힐러리든 오바마든, 또 그들이 정부차원에서의 의료보험의 확대를 하나의 선거쟁점으로 들고 나왔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관심을 쏟을 여유는 없다. 더 나아가 보험체계가 민영 보험회사와 제약회사에 잠식당해 환자가 엄청난 의료비용을 감당해야 하고, 미국인의 개인파산 원인 중 3분의 2가 바로 이 과도한 의료비 때문이며, 아울러 4천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보험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매체로 접하게 되더라도, 내가 이 조그만 땅 덩어리에 받을 딛고 있는 이상 미국인의 곤경을 이해하는 인류애를 발휘하기란 어렵다는 얘기다. 다시 한 번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나라, 아니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 세상이다. 지금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곳을 돌아볼 여유를 제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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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기업의 횡포로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지역주민들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총기사건으로 죽어나가는 국민들이 있어도 모른 척 하는 기득권층의 위선을 까발리거나, 이라크전이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를 위한 것이니 뭐니 떠들어도 결국 뻔한 속내는 석유와 무기산업를 둘러싼 전쟁이라는 것을 (설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해주며, 미국의 아픈 곳을 자꾸만 찔러주는 마이클 무어가 이번엔 잘 사는 나라에서 형편없는 의료보장을 받는 자국민들의 모습을 한편의 다큐멘터리에 담았다.



내 관점에서 본다면 마이클 무어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이 같은 일련의 영상들을 만들어냈든, 아니면 그것으로 그가 금전적 부를 축적했든 간에 그는 영락없는 미국의 애국자다. 의도와 과정을 떠나서 결과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마이클 무어가 애국자인 것과 미국의 의료보험체계가 말할 수 없이 엉망인 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지는 한 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시코>를 보며 취할 행동이란 고작 그들의 그것에 비해 조금 더 잘 잡혀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보험체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마이클 무어의 엉뚱한 애국질에 킥킥거리며 웃어주거나 하는 게 다일까. 물론 그런 것들도 나름대로 의미 있을지는 몰라도 영화 <시코>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까지 논의를 확산시킨다. 그리고 우리네 삶 전반에 걸친 그 본질적인 해결책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수확이다.

마이클 무어가 영국에서 만난 영국의 전 하원의원 토니 벤은 민주주의가 가지는 의미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째서인지 지금 애써 외면하고 있는 어떤 정치형태의 본질과 기능 말이다. 그는 민주주의의 확립이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일이라 말하는데, 이는 힘이 있는 개인이 그것을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에게 주어진 권리는 기득권층에 의해 때때로 저지된다.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개인의 경제력 등을 악화시켜 그들이 절망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고, 이로 인해 민주사회로의 참여를 막음으로써 개개인에 주어진 권리의 사용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그 ‘선택의 자유’를 누릴 여유를 갖지 못한다.


토니 벤은 덧붙여 이렇게 이야기 한다. 국가가 국민을 통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국민을 겁먹게(frighten) 하거나, 혼란스럽게(demoralize) 만드는 것이다. 교육을 받고, 건강하고, 자신감에 차있는 국민들은 통제하기 어렵다. 기득권층은 하위계층이 더 알고, 더 건강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들은 국민들이 그저 자신의 자리에 안주한 채, 더 이상 무엇을 말하거나 요구하지 않기를 원한다. <시코>에서도 이런 ‘국가의 통제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기득권층과 결탁한 미국의 미디어는 민간보험이 국가에 종속된다면 국민들은 훨씬 못한 의료지원을 받게 될 것이며, 의사들도 제대로 된 경제적 지위를 얻지 못할 것이라 주장한다. 아울러 그들은 의료복지정책이 미국에 비해 안정적으로 체계화된 유럽을 예로 들면서, 그 때문에 유럽의 사람들이 끔찍한 의료지원을 받고 있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과정은 대개 목적을 위해 선택된 몇 가지 수치만을 조합하면 끝나는 간단한 것이다. 미디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그 조합들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 얼마만큼 영향력이 있는지, 또한 과연 그것이 진실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즉 미디어의 주장에 수동적으로 동조하고 마는 것이다.

기득권층과 미디어는 이런 왜곡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왜곡은 토니 벤과 마이클 무어가 각각 설명하고 화면으로 보여줬듯이 ‘공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기득권층은 자국의 국민들에게 지금의 시스템이 가장 안전하다는 인식을 주입하고, 이것이 변할 경우에(국가가 보장하는 의료보험체계으로 돌아설 경우) 마침내 엄청난 혼란이 올 거라 국민들을 ‘겁주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이 논의를 양 체계(미국과 캐나다, 혹은 미국과 유럽)간의 의료기술의 수준차이로 돌려 세우며 논점을 빗겨가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의료지원을 받을 수 있느냐’이지 ‘아무리 소수일지라도 얼마나 높은 기술차원의 의료지원을 받느냐’가 아닌데도 말이다. 설령 미국의 의료기술이 세계최고라 인정하더라도 그 기술이 자국의 국민들에게 폭넓게 돌아가지 못한들 무슨 소용인가. 결국 발전과 그 혜택의 분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마이클 무어는 공동체를 위해 개개인이 연대하고 상황을 주시하라 말한다. 이것은 비단 의료보험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 즉 의료를 포함, 교육, 육아 등,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모든 과정들이 국민의 편의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만들려면, 나 하나 잘 살겠다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목소리를 멈추고 있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을 위해 연대하고 움직이는 것이 결국엔 우리 자신에게 돌아올 혜택을 보장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장악한 기득권층은 결코 이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포’와 ‘혼란’을 주입할 것이며, 이것은 대중매체를 비롯한 각종 미디어로 구체화 될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일반 국민들이 그저 조용히 있어주길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간, 결국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왜 민주주의라는 ‘혁명적 도구’, 즉 개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거나 주장할 수 있고, 그 권리를 스스로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이 편리한 정치제도를 스스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시코>가 보여주는 것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대상이 국가가 되었든, 아니면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는 자본이 되었든, 우리는 항상 그들을 주시해야 한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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