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책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 당신의 책은 안전합니까

<위험한 책>은 저자(著者)를 떠난 책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의 인생에 관여하는 지에 관한 짧은 이야기다. 책 속 ‘나’의 동료인 블루마 레논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막 사서 읽다가 차에 치였고, 주인공의 친구를 비롯한 몇몇 주변인들도 떨어진 백과사전에 머리를 맞아 반신불수가 되거나 구석의 책을 꺼내려다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슬프면서도 상상이라 생각하면 왠지 우스운 이 일화들을 보여주는 것보다, 책의 ‘무서움’, 그러니까 그것들이 인간의 일생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오는 일종의 ‘두려움’을 설명하기란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운명이 좌우된 그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책의 우산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은 왠지 낯설다.

 


인간이 성장하면서 신념과 사상, 그리고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모두 그가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이야 인터넷과 각종 대중매체들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곤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 영향력 중 많은 부분들은 책들이 마련해주고 있다. 누군가는 어떤 책을 읽고 인생의 전환점을 구상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어느 책을 읽으며 인생의 진리(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를 발견하기도 한다. 내 앞집의 어느 초보부부는 갓 사들인 요리책들에서 서로에게 해 줄 음식들을 고르기도 할 것이고, 뒷집의 어느 소녀는 조앤 롤링이나 톨킨의 책을 읽으면서 판타지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할 것이다.

한 손, 아니 커봤자 두 손에는 잡힐 듯한 이 작은 부피의 종이모음이 그 안에 담긴 언어로 우리를 유혹하는 일들은 이렇듯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때로는 거부하는 행위를 통해서라도,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의 정신세계와 삶, 그리고 종종 미래로의 방향을 구축한다. 그것은 마치 저자를 떠난 책 한 권이 그 내용을 이 사람의 머리에서 저 사람의 머리로 옮겨가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지은이를 떠난 책은 더 이상 그 개인만의 소유물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아마 <위험한 책> 안의 브라우어라는 인물도 이런 책들의 마력에 둘러싸여 마음을 빼앗긴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 물론 그것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면서 책의 내용보다도 책의 존재자체에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위험한 책>이 우리 일상을 향한 책들의 광범위한 참견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때론 책들이 말 그대로 ‘위험한 물건’이 되던 시대도 있었다. 지금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고, 내 나이의 또래들은 결코 겪어보지 못한 그런 ‘희한한’ 시대와 경험들. 불온서적과 불법간행물로 낙인찍힌 수많은 책들이,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넣거나 그들을 모질게 대했던 일들에 빌미가 되었다.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초반까지 군사독재를 경험했던 아르헨티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나 보다. 사람들이 책들을 숨기는가 하면,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을 찾아내어 책들의 주인에게 책임을 묻거나 하던 시절. 독재정권에게 그 책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책’이었으며, 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에겐 그것이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책’이었다. 한 권의 책이 (지금에 와서는) 우습게도 정말 위험한 어떤 것으로 간주되던 때가 있었던 거다.

아마도 모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행동의 방향을 결정해주는 책들의 마력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누군가 아직도 어떤 책을 ‘위험하다’고 설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신이 그것으로부터 안위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지키기 위해 어떤 이들은 ‘위험한 책’의 목록을 만든다. 그러나 어떤 책이 ‘위험하도록’ 내버려 두느냐 마느냐는 모두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누군가는 ‘위험한 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 선택을 끈질기게 방해할 테고 말이다. 무언가를 지키려는 사람과 그것을 되찾으려는 사람들.

우리는 책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작가인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가 <위험한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책이 ‘위험’하다는 것 뿐 아니라, 수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상징’하는 것이었을 게다.
 

위험한 책 - 8점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지음, 조원규 옮김/들녘(코기토)


덧붙임.
델가도씨가 말하는 책의 ‘통로’에 대한 이야기.

그는 내게 아무 페이지나 펼쳐 각 단어들의 간격으로 생겨난 수평이나 수직 방향의 길들을 쫓아가 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과연 내 눈앞에 행과 행들이 만들어내는 긴 통로들이 나타났다. 단락들을 횡단하거나 때로는 끊어지다가, 끊어지면 대각선 방향으로 진로를 터서 종횡으로 또는 자유롭게 낙하하듯이. p.62

“언어의 리듬을 구사하지 못하는 작가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작가는 한 문장 안에 네 철자 이상의 단어를 수없이 사용해 언어를 파괴하고, 텍스트의 리듬과 통로를 망쳐버립니다. 그런 책에서 통로를 찾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지요. 글자들의 간격이 너무 좁거나 넓게 편집된 조악한 책은 문자들이 은밀하게 이루어내는 형상을 찾으려 하는 독자들의 눈에 폭력을 가하는 셈입니다.” p.64

문득 내가 쓴 조악한 글들에서 이 ‘통로’를 찾아내려 시도해본다. 간절히 바라건대 나의 글이 ‘텍스트의 리듬과 통로를 망쳐’ ‘언어를 파괴’하는 일이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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