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장사 마돈나 (2006) - '살고' 싶은 소년의 뒤집기 한판

<천하장사 마돈나>는 영리하면서도 한편으로 교묘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소년의 삶은 여러 갈래의 이야기로 파생될 여지를 만들어 두는데, 이를테면 이 영화를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의 성장기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편견에 맞서는 성적 소수자의 투쟁의 이야기, 혹은 마지막에 진정한 승리를 이루는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로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천하장사 마돈나>가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힘든 사춘기를 보내는 소년 오동구(류덕환)의 이 파란만장한 성장기는, 이 여러 요소들을 너무나 절묘하게 얽어 매어 놓는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 한편의 영화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기회를 얻은 셈이고, <천하장사 마돈나>는 이런 여러 재료를 섞어 한마디로 ‘잘 만든’ 영화다.


그러니까 <천하장사 마돈나>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역시 관객의 취향과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그 중 하나가 이 영화가 성적 소수자를 다루는 큰 줄기 위에, 소년의 성장과 학원 스포츠의 쾌감을 살짝 얹어 놓았다는 시각일 테지만, 다시 말하면 이것은 씨름이라는 종목의 스포츠를 중심으로 나머지 이야기를 끄집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즉 <천하장사 마돈나>는 크게 볼 때, 좌절과 극복, 그리고 승리로 이어지는 여느 스포츠 영화의 기승전결을 그대로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연민과 이해(비록 완전하진 않을지라도)를 불러오거나 필요로 하는 소수자의 이야기가 영화 전반에 걸쳐 매우 강하게 울림으로써, 이 영화를 단지 한 장르에 국한시키지 않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오동구의 사춘기는 투쟁의 역사다. 집에서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마주하고, 교실에서는 ‘왕따’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씨름부에서는 운동에 ‘올인’하지 않는 외인으로 취급 받는 이 소년의 청소년기는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다. 여기저기에서 치이는 오동구가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생존의 밧줄은 그의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그의 대사 그대로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여자로 ‘살고’ 싶은 동구의 간절한 바람은 언제나 여러 가지 암초들이 산재한 현실에 부딪힌다. 사실 관객은 그의 성적 정체성 자체보다 이 소년이 겪는 어려움의 단계를 상상하며 그의 성장에 공감하고 연민한다. 씨름부의 일원으로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오동구의 여정이 더욱 탄력 받는 이유도, 운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어려운 삶(즉 여자가 아닌 남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써 씨름이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구의 투쟁은 삶의 투쟁이지만, 그 길 한 가운데 있는 스포츠의 의미를 관객은 간과할 수 없다.


이제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그렇거니와 관객에게도 마치 ‘정신적 스승’처럼 느껴질 배우, 백윤식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지금이 행복’이라는 영화 속 메시지가 의미 있는 까닭도, 이 영화가 학원 스포츠를 단순히 아무 의미 없는 수단의 하나로 전락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동구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의미로 자리매김하게 될 이 운동종목이 결코 이 소년의 미래의 모든 것은 아니다. 허나 이미 영화의 수려한 화술에 빠져든 관객들에게 씨름부 감독의 저 조언이, <천하장사 마돈나>를 마치 스포츠 영화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했던 요소들을 잠시 뒤로 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영락없이 다시 그 승부의 세계(혹은 승부를 앞둔 그 들뜬 분위기)에 집중하게 만드는 마력을 뿜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 다양한 감정의 선들 사이를 능란하게 오고 가는 <천하장사 마돈나>는 정말이지 교묘하면서도 영리한 영화다. 영화 속 오동구의 시원한 뒤집기는 스크린 밖에서도 유효하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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