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 戒 / 색, 계 (2007) - 인간에 대한 연민, 영화에 대한 영화

이안의 최고작이라 일컬어지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영화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한다는 것이 마음 편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의 영화들에 ‘깊이’ 공감하거나 ‘커다란’ 매력을 느껴 본 기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나마 <결혼 피로연>과 <음식남녀> 정도를 재미있게 본 것 같고, 제작규모의 크기에 대한 책임감이 없어 보였던 <헐크>, 정작 영화보다 해석(주변에서 해준 것이든 감독 스스로가 풀어낸 것이든 간에)이 더욱 풍부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와호장룡> 등, 이후 이안의 영화들은 어딘가 모르게 가깝지 않은 느낌이다. 중화권에서 제작되었던 그의 초기작들을 제외한다면 이처럼 ‘글로벌’한 아시아계 영화작가가 또 있을까 싶은 이안의 필모그래피는 확실히 인상적이지만, 내겐 그것이 ‘소재와 인식의 세계화’ 이외에 어떤 의미도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원작을 발판 삼아 그려낸 일제강점기의 중국의 단면엔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거부하는 ‘세계인’의 의지가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이안은 이른바 친일파와 애국자 사이에 어떠한 기준점도 배치하지 않은 채, 그들을 마치 장기판에 놓여진 애꿎은 장기짝처럼 묘사한다. 말하자면 <색, 계>의 등장인물들은 겉으론 자신의 일관된 선택에 의해 행동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역사의 한복판에 스스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수동적인 캐릭터들이다. 선택의 순간엔 항상 목적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거나, 정연했던 계획과는 무관한 의외성이 치고 올라온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이들을 역사의 작은 지점들에 임의로 꽂아놓는 모양새다. 이 세계는 의지와 사상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는 혼돈과 무질서의 공간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나약한 인간들은 끝없는 갈등과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 몸서리친다. <색, 계>의 이(양조위)와 왕치아즈(탕웨이)가 나누는 정사에는 그런 이안의 작품 안 시대적 공기와 그 영향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과 죽음 안에서 절정을 발견하는 위태로운 과정이며, 육체와 정신의 울타리가 완전히 해체되는 비현실적인(현실을 거부하는) 순간이다.

 


개인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보류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적군과 아군의 경계가 없는 이안의 세계는 결국 모든 인간들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고 봐야겠다. 친일파 이는 오로지 생존을 목적으로 민족을 배신했으나 그 더러운 사실 안에서 심리적인 자학에 시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육체의 연기가 정신을 흡수해버린 왕치아즈는 마치 어리석은 사상의 희생자처럼 그려진다. 특정 지역의 역사의 가치판단 안에서라면 당연히 높고 낮음이 분명할 이 대립은 <색, 계> 안에선 똑같이 불쌍한 인간들일 뿐이다. 글쎄, 순간 이런 주제(격렬한 섹스씬이 아니라 역사인식의 탈민족, 탈국가라는 측면에서)의 영화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나왔더라면 어떤 반응을 가져왔을까라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지만, 어쨌든 <색, 계>를 통해 이안이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간존재의 보잘것없음에 대한 묘사는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로부터 등장인물에 대한 관객들의 연민을 이끌어 내는 데 영화는 성공한다. 이건 왕치아즈와 이 뿐 아니라, 신념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여자를 격동의 사지로 내몬 광위민(왕리홍)과 친일파에 가족들을 잃고도 냉철한 작전을 기도하는 우 영감(도종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이들은 민족, 국가라는 대의를 위해 사랑과 생명을 담보로 맡기는, 그래서 어리석으면서도 더 불행한 인간들로 느껴진다.


한편 이 영화는 감독의 언급에서도 알아낼 수 있듯이 마치 ‘영화에 대한 영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영화 속 연극부 대학생들이라는 설정에서부터 상상할 수 있지만, 누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접근하다 도리어 자신의 정신마저 그 연기에 사로잡히고 마는 과정을 영화라는 매체 이상으로 비유할 대상은 없는 것 같다. 연기란 본래 상대방을 속여 심리적으로 ‘설득’하는 과정이 아닐까. 육체로서 이를 ‘설득’해 안심(安心)의 함정을 노리려던 왕치아즈는 마치 스크린을 통해 우리를 ‘설득’하는 배우를 연상시킨다. 날카로운 관객들은 그녀의 몸의 연기를 통해 속내를 파악한다. 우리를 안심시키려면 그녀는 ‘진짜’ 절정을 보여줘야 한다. 뇌에서 계산된 연기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처럼 말이다. 배우는 영화 속 자신이 실제자신인지 설정된 캐릭터인지 구분해 낼 수 없을 때 가장 빛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때론 배우에게 혹독한 정신적 폐해를 가져다 줄 가능성을 남긴다. <색, 계>의 왕치아즈가 그런 갈등 속에 파멸로 사라져가는 인물이며,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는 본인과 막 부인은 물론이고 스크린 밖에선 배우 탕웨이로서 관객 앞에 서게 된다. 어쩌면 이와 대면하는 왕치아즈는 영화 속 관계를 벗어나 스크린을 마주본 채 관객들과도 흡사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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