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큰 / Taken

당신에겐 딸이 있다. 비록 이혼 후 돈 많은 남자와 재혼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지만. 벌써 다 큰 처녀처럼 보여도 당신에겐 여전히 어려 보이는 이 딸 녀석이 한 눈에 봐도 놀기 좋아하는 친구를 대동하고 유럽엘 놀러 간단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그 유럽엘! 그래도 마음 넓은 아버지인 당신은 도착 즉시 전화한다는 조건하에 딸의 여행을 허락한다. 그러나 아뿔싸, 이 위험하고도 위험한 유럽은 당신의 딸을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악랄한 인신매매 집단에 의해 납치당한 당신의 딸. 당신이라면 어쩌겠는가? 여기에 당신이 과거 각종 생존기술과 살인에 능한 특수집단에 속해 있었다면? 당신은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이미 ‘지옥행 특급열차’를 타버렸다고!


온화한 표정의 리암 니슨은 가까이 할 수 없는 딸아이를 그리워하는 자상한 아버지로서 최적의 얼굴이다. <테이큰>은 딸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이 아버지의 강렬한 부성(父性)을 담보로 삼는다. 영화에서 그 부성을 구축하는 과정은 지독하리만치 단순한데 이를 테면 영화 초반 리암 니슨의 대사는 온통 딸과 관련해 애틋한 마음을 담은 아버지의 고백이다. 또한 아직 어른의 보호 하에 있는 것이 당연하게 보이도록 딸이 그 장성한 육체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 같은 행동을 자주 보여주는 것도 영화의 전략이라면 전략이겠다. 이렇게 영화가 주인공의 강렬한 부성을 주먹구구식으로 형성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영화의 앞 부녀의 관계구축에 할애된 짧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빠르게 지나친다는 점에서 그다지 문제가 되진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테이큰>이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후 이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들을 속 시원히 소탕하는 리암 니슨의 ‘무자비함’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초중반 이후 분노한 아버지의 얼굴에 주목한다. 관객은 그가 결국엔 딸을 구해내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테이큰>의 편집은 굉장히 빠르며 씬과 씬 사이의 빈 공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쓸데없는 설명이나 배경은 필요 없이 카메라는 딸을 찾을 일념에 사로잡힌 아버지의 행동을 쫓는다. 부성을 매개로 한 분노는 범죄자들을 향한 리암 니슨의 자비 없는 액션에 힘을 싣는다. 관객은 어느새 딸의 무사여부와는 별개로 공공의 적을 향한 대중의 분노를 주인공과 공유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리암 니슨이 악당들에게 내미는 죽음의 손길은 때로 속 시원한 판타지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로부터 (억지로라도) 끌어낼 수 있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현안적 문제제기를 ‘제발’ 뒤로하고, 영화는 적어도 분노 해소의 장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시대를 건너 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순(무식)함으로 일관하는 <테이큰>은 그래서 오히려 더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찌 보면 공허할 정도로 아무 일 없어 보이는 영화의 엔딩과 마주하더라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 <테이큰>은 영화 속 주인공의 ‘분노의 폭발’에 반응하는 관객의 ‘단순한 태도’에 관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영화가 아닐까. 단순한 영화를 대하는 관객의 단순한 시선. 진정한 ‘킬링타임’의 의미다. <테이큰>은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