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비긴즈 / Batman Begins

검은 도시 ‘고담’에서 검은 망토를 휘두르는 이 백만장자는 모든 범죄의 원흉을 잡아들일 기세로 움직인다. 도시를 구원하고자 하는 그의 신념은 때로 범죄자를 거둬들이는 행위 자체에 경도된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의 끝이 영원히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에서 고든 경감은 배트맨에게 쫓는 자들(배트맨)과 쫓기는 자들(범죄자)의 힘의 균형은 서로 경쟁하듯 커져만 갈 것이라는 뉘앙스의 대사를 읊는다. 그것은 악당이 있는 한 배트맨은 움직이고, 배트맨의 망토가 펄럭이는 사이 악당들은 다시금 그를 필요로 하는 범죄를 실행에 옮길 거라는 암시다. 이 두 존재는 서로 없애야 하는 대상에서 결국 공생하는 관계가 된다. 브루스 웨인이 헛된 이상을 꿈꾸는 망상가가 아니라면 도시를 정화시키고 말겠다는 그의 바람은 스스로의 능력을 과시하고픈 과도한 자신감의 표출이거나 어린 시절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복수심의 발로일 것이다.


영화에서 브루스 웨인의 스승이자 암살자 집단의 실질적인 리더이기도 한 듀카드(리암 니슨)은 부패와 범죄가 지배하는 고담시 자체를 제거하려고 한다. 그는 이미 이 암흑의 도시가 회생불능의 상태에 와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브루스 웨인인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백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고담시의 왕자로 자란 이 사나이는 훈련을 통한 신체적 능력의 획득과 함께 한참을 떠나 있던 경제적 능력을 되찾음에 따라 이제는 자신이 도시의 수호자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한다. 고담시의 구세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말이다. <배트맨 비긴즈>는 무정부주의적인 과격파와 이상적이며 자아도취적인 몽상가를 동지에서 적으로 대치시킨다. 듀카드의 행동이 반인륜적인데다 폭력적이라 비판할 순 있겠으나, (절대) 끝나지 않을 전쟁을 선택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법 외곽에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웨인도 쉽게 판단 내리기 힘든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갖추고도 늘 생활고에 시달리는 피터 파커의 삶을 보는 것만큼이나 브루스 웨인의 여정을 지켜보는 것이 흥미롭다. 여기엔 무결점, 절대선의 신이 아닌 인간이 있다. 크리스터퍼 놀란의 배트맨은 영웅의 판타지에 현실을 녹아낸다. 영웅이 악당과의 대척점에서 제 할 일만 마무리하고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크린 밖의 관객들에게 불편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범죄와 퇴치, 범법과 준법, 그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를 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관객은 어쩌면 현실에 있을 법한 이 박쥐 사나이를 떠올린다. 물론 <판타스틱4> 시리즈처럼 알록달록하고 시원시원한 히어로영화도 보는 즐거움이 있지만, <엑스맨> 시리즈에서 <스파이더맨>, <배트맨 비긴즈>에 이르는 고민하는 영웅상은 그들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또 다른 형태의 판타지(!)를 낳기에 우리는 더욱 빠져들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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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배트맨 비긴즈>는 이야기의 모든 부분이 과도한 심각함 속에 매몰되는 실수를 저지르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웨인의 또 다른 아버지 상이자 충실한 조언자인 알프레드가 만들어내는 의미 있으면서도 재치 있는 대사들과 함께 배트맨이 듬직한 텀블러를 타고 펼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추격전에서 경찰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들처럼, 이 박쥐사나이의 특별한 존재감을 소재로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는 부분들이 <배트맨 비긴즈>엔 꽤 존재한다. 영화의 묵직한 느낌과는 별개로 <배트맨 비긴즈>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부분들이다. 마치 이 한 편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극도로 어두운 색채를 띠는 것을 경계하는 몸짓처럼도 보인다. 영웅의 이야기에는 관중의 환호가 뒤따라야 하고 그를 위해선 인물들이 고민의 나락에 빠져 조금의 틈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의 모양새가 부담스럽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어떤 요소도 <배트맨 비긴즈>에선 불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이 새로운 시작은 시의 적절한 고민과 영웅이야기의 설렘, 그리고 순간의 여유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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