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브레이커블 / Unbreakable

* 스포일러 포함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은 영웅과 악당의 상관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을 담고 있다. 잘 생각해보자, 히어로물의 주인공들은 결코 빵 훔치는 소년이나 신용금고를 털려다 여직원에게 붙잡히고 마는 소심한 강도를 응징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들은 핵융합 기술로 인류를 위협하는 미친 과학자나 온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계획을 가진 싸이코패스, 혹은 영웅과 거의 동등한 능력을 가져 그 힘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는 자아도취 정신병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영웅의 출현은 악당의 존재와 맞물려 이루어진다. 즉 거대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악당이 없으면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도 볼 수 없다는 얘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문제 혹은 끝없이 반복되는 뫼비우스의 띠와도 유사하다. 악당은 영웅을 탄생시키고 영웅을 다시금 악당을 끌어 모은다. <언브레이커블>은 슈퍼히어로의 이 어두운 공식을 진지하게 되새긴다.


뼈가 쉽게 부러지는 선천적인 신체결함으로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Mr. Glass’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일라이저(사무엘 L. 잭슨)는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진 영웅의 존재를 믿는다. 세상에 자신처럼 쉽게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딘가엔 조금도 다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라는 신념. 한편 풋볼경기장의 경비원인 데이빗 던(브루스 윌리스)은 열차전복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다. 그의 믿을 수 없는 생존사실에 일라이저는 관심을 보이고 그에게 자신이 오랫동안 믿어왔던 영웅에 대한 가설을 알려준다. 자신의 가설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앓아본 경험 없을 뿐 더러 두 번의 큰 사고에서 상처조차 없이 살아남은 그가 바로 코믹스 속 슈퍼히어로와 같은 존재라는 것. 더구나 일라이저의 생각으론 데이빗은 직감적으로 위험한 인물을 알아보는 특수한 능력과 물을 두려워하는 약점을 고루 가진 전형적인 만화 속 영웅이다. 하지만 데이빗은 일라이저의 설명을 오랜 병을 앓아 마음이 허약해진 망상가의 착각으로 치부하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일라이저와 데이빗은 양 극단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다. 만화책을 읽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희귀질환자인 일라이저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정신적 차원에서 극복하려 한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을 지배한 코믹스 속 슈퍼영웅이지만, 이는 거동조차 불편한 그가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꿈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웅의 존재는 그의 이상세계를 완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바로 그 자신이 악당이 되는 것. 영웅의 존재는 위협적인 악당 없이는 성립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웅의 출현이 그를 완성시킨다. 악당이 된 스스로의 모습은 영웅을 만들어낸(발견해낸) 창조자인 동시에 영웅의 유일한 대항자이다. 일라이저는 그 모습 안에서 손실된 자아를 찾아낸다. 이는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데이빗도 마찬가지로 일라이저를 만난 이후로 아내와의 관계회복과 함께 그의 일상을 지배하던 왠지 모를 우울감(일라이저는 그것을 데이빗이 영웅의 사명감을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을 모두 떨쳐낸다.


그러나 존재의 평형을 이루는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필요로 했다. 악행이 히어로를 불러낸 셈이다. 일라이저는 영화의 막판 데이빗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결국 그의 참모습을 알게 된 데이빗은 일라이저를 경찰에 인계하지만 어쩌면 그는 또 다른 종류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일라이저의 끈질긴 설득과 그의 처절한 악행이 없었다면 데이빗은 여전히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며, 아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라이저에 대한 데이빗의 감정은 비록 실질적 행위는 없었다 해도 심리적 공범자에 가까울 것이다. 이는 마치 코믹스의 여타 히어로들이 자신들 때문에 악당이 몰려든다고 고민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데이빗은 진정한 자신을 찾아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다. 반면 일라이저는 데이빗을 발견함으로써 목적을 이루었다. 이렇듯 악당과 영웅의 존재는 밝혀졌지만 과연 누가 승리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샤말란의 이 조용한 히어로영화는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영웅과 악당에 대한 가설을 그것이 현실인양 굉장히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마치 화려한 코믹스의 세계에서 모든 효과와 색채를 제거해 낸 것처럼 건조한 어조로. 잘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고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한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꼭 현실의 그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차분하면서도 일관된 분위기를 연출해 낸 샤말란의 능력 때문이다. 여기에 데이빗의 얼굴. 피곤한 브루스 윌리스의 얼굴은 꼭 퇴역한 슈퍼히어로의 그것을 보는 듯 하다. 모든 특수능력을 악당에게 소모 당한 채 일상의 무기력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언브레이커블>은 이 무기력한 얼굴을 통해 아이러니한 영웅의 탄생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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