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쉬백 / Cashback

모든 사랑의 사이사이엔 시간이 멈추는 순간 또는 멈추길 간절히 바라는 순간이 있다. 그 시간만큼은 초현실의 공간, 그래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째깍째깍 잘도 넘어가는 저 초침을 어떻게든 반대방향으로 돌려보고 싶어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시간이 흐르면 좋은 순간을 지나 오해의 지점을 건너 견디기 힘든 헤어짐의 단계에 다다르는 것이 모든 사랑의 결말이다. 반대로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르길 바라는 순간이 온다면? 방금 여자친구와 헤어진 화가지망생 벤 윌리스(숀 비거스태프)에겐 시간은 멈추길 바라긴커녕 오히려 더디게 흐르는 애물단지이다. 벤이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도 추억이 떠오르지만 그럴수록 고통스런 순간들은 늘어난다. 까만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는 벤은 하루 중 더 얻게 된 그 시간만큼 전 여자친구 수지를 떠올린다. 이거 참 견디기 힘들다.


벤은 의도하지 않게 덧붙여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슈퍼마켓 야간 파트타임 일을 시작한다. 괴짜 상사에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남자 점원들, 그리고 꽤 괜찮아 보이는 한 명의 여자직원이 전부인 이곳에서 벤은 시간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미 수지로 인해 시간의 연속성을 위협받게 된 벤은 이 순간들을 빨리 지나치는 것조차 수월치 않다. 그의 정신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 상상과 현실 사이를 어지럽게 오간다. 그래서 벤은 한가지 해결책을 스스로 고안한다. 어차피 시간이 빨리 흐르지 않는다면 반대로 아예 멈춰버리겠다는 것. 멈춘 시간 안에서 벤은 대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해 한 장의 캔버스 위에 펼쳐놓는다. 그것은 슈퍼마켓 안, 시간에 갇혀있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여성들의 나신이다.

 


<캐쉬백>은 벤의 이런 시도를 상상과 현실의 어디쯤 위치한 것처럼 묘사한다. 마트에서의 벤의 상상은 실은 그의 예술가적 희망과 그 기질을 초현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관객에겐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을 완전한 상상이라고 믿는 순간에 상상과 현실과의 접점을 증명하는 장면들이 출몰하는 것이다. <캐쉬백>은 이 경계선을 명확히 긋지 않으면서 영리하게 관객을 빨아들인다. 그리고 한편으론 정지된 시간과 영화의 편집점을 교묘히 맞물려 코믹하고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큰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사랑을 다룬 여타 영화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이렇게 감각적으로 짜인 시간의 불연속성이다. 시간의 끊김과 지속을 반복하는 영화의 움직임은 장소와 장소를 건너뛰는 세련된 편집에도 반영된다. 인물의 심리나 사건의 추이에 따라 서로 다른 장소를 연결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시간을 건너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캐쉬백>은 시간을 다루는 영화들 중 단연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이다. 과도하게 로맨틱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영화의 엔딩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벤은 지난 사랑을 잃음으로써 시간의 더딘 흐름을 원망했지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멈춘 시간을 그녀와 공유하길 원한다. <캐쉬백>은 때로는 빨리 지나갔으면 싶은, 때론 아예 멈춰버리고 싶은,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감정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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