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퀀텀 오브 솔러스 / Quantum Of Solace

<퀀텀 오브 솔러스>는 <카지노 로얄>에 이어 연인 베스퍼(에바 그린)를 잃은 본드의 복수의 여정을 다룬다. 내용상으로 시리즈 최초의 연작인 만큼 두 작품은 감독이 각기 달라도 닮은 부분이 많다. 액션장면을 다루는 방법이라든지 두 작품을 이어주는 본드의 성격 등, 크게 다르지 않은 분위기가 이어지므로 전작에 만족했던 관객들이라면 이 속편에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액션장면의 경우 역시나 전작에 비해 연출의 강도가 세 보인다. 예고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본드는 과격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액션의 절정의 순간에 베스트 컷으로 불릴만한 멋진 포즈들을 다수 만들어낸다. 기존의 본드를 연기했던 선배들과 다르게 다니엘 크레이그의 몸은 왠지 이런 상황에 훨씬 익숙할 것 같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본드는 어떠한 위기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보호할 갑옷을 입은 전사처럼 보인다. 능수능란한 말솜씨와 여심을 녹이는 미소 대신에 그가 가진 것은 바로 액션에 특화된 몸이다.

 


따라서 잘 짜인 대부분의 액션씬은 충분히 즐길 거리가 된다. 몇몇 장면은 적절한 CG와 노련한 연출로 작은 탄성을 지어낼 정도다. 그리고 그것이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본드의 모습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영화에 열광할 수 있는 이유다. 본드는 망설임 없이 쏘고, 터뜨리고, 죽이고, 부순다. 이국적인 모습의 국가들을 배경으로 액션의 롤러코스터가 펼쳐진다.

 

 

<카지노 로얄>에서 본드의 사랑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퀀텀 오브 솔러스>에선 본드걸에게 큰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본드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아픔을 복수로 달래려는 조력자 카밀(올가 쿠릴렌코)은 베스퍼를 추억하기엔 다소 다른 이미지를 풍긴다. 그녀는 당찬 모습 속에 연약한 내면을 감춘 채 어떤 강렬한 인상 없이 영화의 러닝타임에 묻혀간다. 도미닉 그린(마티유 아말릭)이라는 악당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전작을 통해 어떤 뚜렷한 개성을 가진 범죄집단의 실체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카리스마가 부족한 느낌이다. <카지노 로얄>이 한껏 키워놓은 기대감이 분명 있고, 그에 따른 실망감 또한 따라오게 마련이다.

흥미로운 악역의 부재는 물론이고, 007 영화에 늘 따라다니던 로맨스의 비중이 줄자 <퀀텀 오브 솔러스>는 차라리 비밀요원으로서의 제임스 본드의 주위를 비추는데 더욱 주력한다. 이를테면 이번 작에선 본드와 그의 상사인 M과의 갈등이 상호간의 강력한 신뢰로 변해가는 과정이 훨씬 부각되어 보인다. 지나치는 곳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키는 본드는 처음엔 M의 신임을 받지 못한다. 이때의 두 사람의 관계는 영화에서 본드가 우스갯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마치 말썽쟁이 아들과 근심 많은 어머니의 그것을 닮아있다. 영화의 엔딩에서 본드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고백하는 M은 듬직한 아들의 귀환을 환영한다. 말이야 바른 말로 기물을 약간 부수고 사람을 조금 해쳐도 결국 거물 악당을 잡아내지 않았는가. 본드는 믿음직한 아들이자 능력 있는 요원이 된다.

영화는 이렇게 바람직한 스파이로 자라나는 본드의 우직한 활약에 집중한다. 그래서 영화의 동기가 되었던 베스퍼와의 절절한 러브스토리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면이 있다. 마치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본드의 진심이 아니라 <퀀텀 오브 솔러스>의 탄생을 위한 하나의 미끼처럼 보일 정도로. 허나 어떤가, 여전히 다니엘 크레이그는 자신이 새시대의 액션스타에 최적의 인물인 것을 증명해 냈고, 마크 포스터의 액션연출은 마치 폴 그린그래스의 그것처럼 예상보다 큰 만족감을 전해주는 걸. 애초에 007 시리즈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조차도 <카지노 로얄>이후의 작품들에는 주목하게 된다. 물론 다니엘 크레이그만 계속 나와준다면.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