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내 눈을 의심했다. <후아유>와 <사생결단>의 감독이 영혼은 물론 육체마저 정확히 일치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기극이다. 적어도 동명이인일 가능성 정도는 남겨줬어야 한다. 어떻게 이 두 영화가 같은 사람의 손으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단 말인가. IMF라는 세 자 알파벳으로 한국을 수식할 수 있었던 시절의, 부산의 마약시장을 둘러싼 생존게임 <사생결단>은 잔인하리만치 숨막히는 밀도의 영화다. 화면은 차갑고 인물은 뜨거우며 사건은 처절하다. 도무지 쉴 틈이 없었던 <사생결단>에 비하면 최호 감독의 그 전작인 <후아유>에서는 열 숨 정도는 돌릴만한 여유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이야기와 우연히 만난 20대 청춘이 서로에게 끌리는 스토리가 어떤 유사한 부분을 가지리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소재부터 확연히 다른 두 영화다. 다만 소재를 포함해서 그 생경한 변화상이 흥미로울 뿐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을 듯한 평범한 인물들과 자극적인 형용은 좀체 사용하지 않는 배경.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도 이런 감정의 시작을 겪었거나 현재 진행형일 것 같은 그 동질감. <후아유>는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랑의 시작을 풋풋한 인물들을 통해 그려낸다. 게임 개발자인 형태(조승우)는 같은 건물(63빌딩)의 수족관에서 일하는 인주(이나영)을 알게 된다. 인주는 형태가 개발한 게임의 유저. 형태는 정식 오픈 전의 홍보자료로 쓰기 위해 인주와 인터뷰를 한다. 이후 인주에 대한 호기심이 인 형태는 게임 속 아바타를 통해 그녀에게 접근한다. 물론 인주는 게임 속 자신의 분신인 별이에게 다가오는 멜로가 형태인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인주는 비록 게임 상이지만 자신을 이해해주는 멜로에게 점점 호감을 느낀다. 이때부터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경계는 조금씩 허물어지고 한쪽은 알고 다른 한쪽은 모르는, 그래서 거짓말과 연기가 병행되어야만 하는 조금은 복잡한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다.

 

 

<후아유>는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만 결코 TV속 트렌디 드라마처럼 관습에 묶인 인물들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적어도 재벌 2세나 시한부 인생의 여주인공 같은 판에 박힌 캐릭터는 이 영화에 없다. 인주가 비록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만 그녀의 닫힌 마음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주가 현실이 아니라 게임 속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영화의 태도는 젊은이들의 통과의례인 사랑의 아픔을 비현실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그것이 결코 현실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하는 쪽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처한 상황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형태도 그렇고 인주도 영화 속에서 모두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다. 형태가 2년여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개발해 온 게임은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이는 통에 성공에 확신을 가질 수 없고 월급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수족관에서 일하는 인주는 자신의 장애 때문에 주위 동료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녀도 자신의 천직을 찾아 방황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사랑이라는 환상의 섬에 단 둘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쉽게 넘기 힘든 현실의 장벽 속에서 삶에 부대끼며 오고 가다 마주친다. 그리고 어떤 거창한 수식 없이 서로를 좋아하게 된다. 지나치기 쉬운 평범함 속에서 감동을 발견하게 하는 것, 이것이 <후아유>의 미덕이다.

영화는 종종 급격한 감정변화로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형태가 인주에게 화를 내는 순간들은 그때까지 서서히 고조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심리변화로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한편으론 이것이 현실의 우리의 모습들, 즉 상대방의 아주 작은 행동에 기분이 상하거나, 하루 종일 뚱했다가도 일순간의 애교에 맥없이 풀어지는 일 같은 경우를 생각나게 한다. 즉 등장인물들의 뜬금없는 행동들이 어떻게 보면 더욱 현실적으로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마치 자로 잰 듯 편집할 수 없는 스크린 밖 우리네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듯.

조승우와 이나영의 모습이 파릇파릇하다. 능글맞으면서도 깊은 속을 조금씩 드러내는 형태의 캐릭터는 조승우의 표정과 잘 어울린다. 한편 형태가 인주에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는 그 유명한 장면에선 나중에 조승우가 인터뷰를 통해 기타연주 대역을 썼음을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았을 것이다. 아울러 이 영화에서 음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데, 최호 감독의 최신작인 <고고 70>으로부터도 음악에 대한 그의 취향을 느낄 수 있듯, 영화 속 선곡된 음악들을 돌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온통 홍대 인디씬의 스타들로 이루어진 사운드트랙은 때때로 영화의 감정선을 방해할 때도 있지만, 형태와 인주의 꾸밈없는 호감을 기름기 없이 수식하기에 알맞다. 레이지본, 언니네 이발관, 불독맨션, 크라잉 넛, 롤러코스터, 줄리아 하트 등의 음악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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