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카타야마 쿄이치)

가슴이 먹먹하다. 벚꽃과 함께 날려버린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여린 심장에 파고들어 따끔거린다. 뭐야, 이거.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평범한 듯 쿨한 소년과 시한부 인생의 미소녀가 서로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시시한 이야기는 안 봐도 뻔하다고 그렇게 스스로 당부했건만. 그러나 우습게도 어느새 나는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낸 소설 속 소년이 되어있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간 책장의 어디쯤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이건 내가 상상했던 그 이야기가 맞는데. 안 봐도 독자의 손바닥 안일 것 같았던.

 


그렇다. 카타야마 쿄이치의 틴에이저 러브스토리,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기억되는 그때의 소중한 순간을 가슴에 아로새기기 위해 여러 가지 관습적인 소재들을 끌어 모은다. 나 같은 녀석은 봐줄 것 같지 않은 인기 많은 여학생이 과분하게도 그 속내를 내비쳐주고, 나는 별 어려움 없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그러다 그녀는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이 불치의 병에 걸려, 이야기는 순식간에 황금빛 연애의 환상에서 잿빛 비극의 애절함으로 그 옷을 갈아입는다. 세상에 대한 의문을 소재로 그녀와 나눴던 대화들, 수줍게 시작해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타이밍을 엿보던 키스의 순간들, 그녀가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줄도 모르고 속내를 내비치고 만 첫경험의 시도. 서로를 조건 없이 좋아했던 그 순간들이 한 순간에 추억의 저장고로 빨려 들어간다.



이 소설의 무기는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비극의 눈물로 여성독자의 섬세한 감수성을 자극하거나, 기억 속의 여신이나 다름없는 여주인공으로 남자독자의 조작된 기억을 건드려 주거나 하는 것. 이렇게 순정만화의 틀을 그대로 활자화해 풀어낸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가 가진 또 다른 한 가지 주요한 도구는 작가의 적절하고 섬세한 감정표현이다. 사쿠와 아키는 그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호들갑스럽지 않게 서로 교환한다. 때론 귀여운 천진함도 보이고 짐짓 어른인 체 하는 유치함도 간혹 느껴지는 이들의 행동은 대상을 억지로 정의 내리려 하지 않는다. 불치의 병만 개입되지 않았다면 너무나 평범한, 아니 조금은 어른스런, 아니 급하지 않게 조금씩 천천히 마음의 나이테를 더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래서 친근하다. 그리고 소설은 아직까진 두근거림이 지속되던 바로 그때로 독자를 되돌려 보낸다.

힘든 순간이 다가오면서 두 사람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려 하지만 사실은 어떤 멋진 말을 담아두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치 어딘가에서 추억의 마지막 장을 조심스럽게 닫고 단단하게 여미라는 주문이 들려오듯,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아키와 사쿠의 이야기는 더 아름다운 순간으로 남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 하며 익숙해지는 것과 멀리 떨어져 언제나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두 갈래의 길을 두고 소설 속에서 둘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읽는 이에게 비슷한 물음을 던진다. 결론은 물론 어느 정도 기울어져 있기는 하다. 상대방과의 이별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것은 기억을 미화하고 추억을 제련한다. 적어도 언젠가 돌아볼 수 없는 그녀를 마음으로부터 놓아줘야 하는 때가 올 때 까진.

아리다. 위악적인 냉정함으로 감성의 수면을 흐트러뜨리려던 애초의 내 각오가 초라해진다. 잠시 동안은 소설처럼 비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인 상상도 해보았고,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간 실연의 기억들을 애써 되살려 보기도 했다. 궁상맞기는. 이 정도면 카타야마 쿄이치에게 KO, 까지는 아닐지라도 판정패 정도. 구태여 이제 와서 후텁지근해진 가슴을 급조한 냉각기로 식힐 필요는 없겠다. 그냥 조금 이렇게, 이대로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나눴던 그 아련한 순간들을 조금만이라도 더 공유하고 싶다. 솔직하게.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