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2008)

* 스포일러 포함

이과를 선택하지 않은 건 인생 최대의 실수다. <21>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숫자에 능한 이들이 살면서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경제활동의 기초는 수학, 어떤 행동이 가져다 줄 이익의 경중을 따질 때에도 계산이 필요하고, 마트에서 일주일 치 장을 볼 때에도 손해보지 않으려면 물건값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한다. 매트릭스 안에서 네오는 해커, 현실에서는 모든 사물을 0과 1로 치환하여 볼 수 있는 초인이 되었다. 당연히 모두 숫자가 개입된 일이다. <21>의 벤(짐 스터져스)은 숫자를 주무르는 것은 물론 기억력까지 좋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었을 때 일확천금을 딸 수 있었다. 그래 맞아, 문제는 이과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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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농담이다.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만큼 머리가 좋지도 수학성적이 그리 내세울만하지도 않았다. 결정적으로 우리 집 근처엔 라스베가스가 없다. 이런 꿈들은 그저 <21>같은 영화를 보면서 달래주면 그만이다.

수재들이 모여있다는 MIT의 학생들이 위대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 흥청망청의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돈을 따낸다는 것이 영화 <21>의 한 줄 요약이다. 모든 성적이 충족됨에도 불구하고 학비가 없어 원하던 하버드 의과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는 주인공 벤은 어느 날 자신이 듣는 수업의 교수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벤의 비상한 머리를 눈여겨본 미키 교수(케빈 스페이시)는 주인공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로 이루어진 그룹에 합류시킨다. 그것은 바로 기억력과 수학을 이용해 블랙잭을 공략하는 팀. 불법도 아닌 정당한 돈 벌기 방법이다. 각자 맡은 역할만 제대로 해낸다면 평생 먹고 놀 수 있는 달러가 수중에 쥐어진다. 벤은 학비를 벌겠다는 일념으로 팀에 합류하고 나머지 멤버들과 호흡을 맞춰간다. 그 와중에 같은 팀 소속이자 MIT의 퀸카인 질(케이트 보스워스)과 사귀어도 보고 신분을 바꿔가며 제대로 임수를 완수해내는 덕에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돈뭉치도 만져본다. 하버드에 입학할 돈만 벌면 그만두겠다는 그의 결심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도박은 마약과 같아서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던데.

 


때론 스타일도 세워가면서 줄곧 경쾌한 편집리듬으로 들뜬 분위기를 표현하는 <21>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도박의 아슬아슬함과 그 나이 또래만이 내뿜는 청춘의 파릇파릇함을 과함 없이 잘 섞어낸다. 천재들의 얘기를 다룬 영화가 대개 그렇듯 보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부러움과 질투심도 가지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신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마음껏 펼치는 주인공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어쨌든 <21>은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들이 늘어지지 않고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의 결말까지 기다리게 하는 힘을 갖추고 있다. 애초에 순수한 마음에 시작했던 순진한 MIT소년이 돈 앞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고, 미키 교수가 학교 내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팀원들을 수족처럼 부리는 모습으로부터 좋은 스승과 악덕 보스를 구분해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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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쉬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린 미키 교수를 엿 먹이려는 의도가 명백히 암시되는 마지막 한판에 교수 스스로 참가를 쉬이 결정하는 장면은 그때까지 철두철미한 사업자마인드로 임해 온 그의 캐릭터에 비추어보자면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어서 드러나는 마지막 반전마저 너무나 뻔히 보이는 그것이어서 막판엔 맥이 빠지기도 한다. 학생들만 이용해먹고 본인은 단물만 챙기는 케빈 스페이시의 정말 얄미운(!) 연기만 아니었다면 불평이 나올 만도 했던 부분.

허나 이런 단점을 크게 개의치 않고 넘어갈 만큼 영화의 전체적인 모양새는 매력적이다. 여기에 <21>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장면, 즉 하버드대 입학문제를 두고 장학생을 관리하는 담당교수의 질문에 주인공이 대답하는 두 장면은 인생에서 경험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는가를 에둘러 강조한다. 소위 ‘스펙’으로는 전혀 달리지 않는 주인공에게 부족했던 것은 담당교수를 압도할 만한 경험. 양복점에서의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던 그가 두 번째의 인터뷰에서 내세울 것이 무엇인지 영화를 본 이들은 알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상대방을 압도할만한 경험이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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