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더듬어 쓰는 부다페스트 여행기 I (2011-12-24)

2011년 말, 유럽에 가게 된 것은 장기출장 덕분이었다. 밤이 되면 세상이 사라지듯 컴컴해 지는 겨울의 동유럽에 머무는 동안, 긴 크리스마스 연휴엔 주변국 몇 도시를 돌아봐야겠다 마음 먹었다.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어 그리 멀지 않고 큰 비용도 들지 않을 곳을 검색했다. 여행이란 세세한 목적도 거창한 목표도 없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적합한 곳이었으면 했다.

우선 부다페스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이어 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여행지는 절반은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두 도시의 호텔을 검색하여 예약하고 기차표와 비행기표를 구입한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해 놓으면 별다른 걱정은 없다.


목적지는 부다페스트.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창밖에 보일 동유럽의 풍경이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는데, 계절이 계절인지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눈으로 덮인 들판 뿐이었다. 마치 비슷비슷한 벌칙이 순서대로 적힌 회전판을 돌리듯 방금 전 본 풍경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등장하고 또 등장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까지 세시간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 동안, 지루한 창 밖의 풍경 대신 나를 달래준 것은 아이패드에 담아온 스티브 잡스 전기와 아이팟 클래식이 틀어주는 랜덤 주크박스였다. 기차독서여행, 기차음악여행도 꽤 괜찮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와 결합되면 그 어떤 것도 근사해지는 것 같았다.



기차가 헝가리 국경을 지나니 경찰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나에게 여권과 티켓을 보여달라고 한다. 제복이 진짜처럼 보이길래 내 신분증과 기차표를 순순히 보여주긴 했다만 사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탄 일등석 칸에는 나 외엔 아무도 없었다. 히터가 공기를 충분히 데워줘 아늑하기도 하고 온 좌석이 비어있어 으스스하기도 한 객실에서 사람과 마주치니 반갑기도 두렵기도 하였다. '이 녀석이 경찰을 가장한 네오나치여서 갑자기 피 묻힌 손도끼를 꺼내 나에게 달려 들면 어쩌지' 하는 괜한 걱정도 약 0.5초간 했던 것 같다. 경찰모자 가장자리로 삐죽 나와있는 옆 머리카락이 보이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토마스 쿡의 음악을 들으며 스티브 잡스의 유년기 이야기를 읽고 나니 어느새 기차는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동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


역에서 부다페스트에 머무는 동안 사용할 교통카드를 사고 얼마간의 유로화를 포린트화로 환전하였다. 동역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습하고 우중충한 겨울 날씨는 헝가리에 대한 고정관념과 잘 어울렸지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호텔까지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다가 역 앞에 정차해 있는 택시기사에게 다가가 호텔 위치를 말하고 요금을 물었다. 너무 높게 부르는 듯 했다. 호텔에 전화하니 친절한 직원이 동역에서 호텔까지의 평균 택시 요금을 알려준다. 아까 택시기사가 불렀던 요금의 5분의 1이다. 높여 부른 요금을 선뜻 낼 승객을 언젠간 만나리라 기원하듯 역 앞에 죽치고 있는 택시 외에 오고 가는 택시는 드물었다. 적지 않은 시간을 기다린 후 호텔 직원이 말해준 요금과 일치하는 가격을 부르는 택시기사를 만나 지체 없이 차에 올랐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차 안은 따뜻했다. 다만 이미 젖은 운동화는 여전히 발을 시리게 했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유럽여행기를 공유하는 어느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올린 소개글을 보고 알게 된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호텔까지의 택시요금을 알려준 남자 직원이 데스크에서 와인잔을 닦고 있었다. 덕분에 바가지 안 쓰고 잘 왔다는 인사를 하며 체크인을 했다.


Bo18 Hotel.


객실은 작지만 청결하고 아늑했다. 호텔 이름이 적힌 웰컴쿠키를 두 입 베어 무니 그 동안 잠자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호텔 직원에게 근처 배고픔을 달랠만한 식당을 문의하니 오늘부터 크리스마스 연휴의 시작이라 문을 연 곳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여행의 큰 즐거움 하나가 먹는 즐거움일 터인데 연휴를 골라 일정을 짠 내 탓을 하였다.

이미 어두워진 저녁 여덟 시 무렵, 비 오는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다가 터키인이 주인인 듯한 케밥 가게에 들렀다. 연휴도 잊은 채 가게를 연 이민자의 삶은 어떤 모양일까 잠깐 생각하다 이내 먹을 것을 넣어 달라는 위장의 강렬한 메시지를 받고 케밥과 구야쉬를 서둘러 주문했다.

가게 위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었다. 나 외에 두 명의 젊은 여성이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도 이 도시에 여행 온 사람들이었으리라. 짭짤한 케밥과 따뜻한 구야쉬는 허기진 배를 채우는 메뉴로 나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의 밤거리.


배를 덥히고 거리로 나오니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거리의 온 상점이 휘황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민 채 손님을 맞이하는 한국의 성탄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거리는 한산하고 문을 연 상점이 없다. 아마도 모두들 각자의 집에서 가족들과 따뜻한 저녁을 보내고 있으리라.

호텔로 돌아와 아이패드로 내일 들를 곳들을 검색해 본다. 몇 군데를 골라 교통편을 체크해 두었다. 히터 옆 가까이 젖은 운동화를 두고 다음날 아침까지 보송하게 말라 있기를 기원하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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