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여행 둘째 날: 부다 왕궁, 겔레르트 언덕 (2011-12-25)

어부의 성채를 벗어나 부다 왕궁(Buda Castle, Budavári Palota) 쪽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 속에서 왕궁까지 걸었던 경로가 희미하다. 왕궁 주변에 위치한 날개를 편 투룰(Turul) 상과 말을 탄 외젠 왕자(Prince of Savoy-Carignan, François Eugène)의 청동상을 본 기억이 또렷한데 거기까지 가는 순간에 대한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잊은 걸까. 인도 바닥의 조각난 보도블록이 눈에 잠깐 스친 것도 같고, 살갗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환한 볕도 생생한데, 어떤 경로로 외젠 왕자 앞에 서게 되었는지는 떠올려지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그 망각의 이유를 찾다 보니, 한 생각이 떠올랐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 잠자기 전 구상한 다음날의 여행 일정에 부다 왕궁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튿날의 여행은 어부의 성채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도심을 굽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취향 탓에, 그리고 역사가 깃든 여행지에 대한 무지 덕분에, 어부의 성채에서 볼 부다페스트의 전경만으로 그날 내가 기대하는 여행의 만족감은 충분히 얻어내리라 상상했던 것이다. 부다 왕궁 주변이 간직한 역사는 내 관심의 바깥이었다. 단지 왕궁이 마차슈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이고, 여기까지 온 이상 한번 보고 가야겠다는 적당한 의무감에 걸음을 옮겼을 터이다. 그 걸음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왕궁까지 내려가는 길은 도저히 떠올려지지 않아도, 부다 왕궁에 도착한 후의 기억은 조금 남아있다.


부다 왕궁의 정면으로 향하자 건물이 드리운 그림자가 차갑게 쏟아졌다. 그 온도가 왕궁 앞을 지키는 청동상을 더 푸르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청동상의 사진을 곰곰이 보며 서늘한 파란색, 파란색이 떠올랐다. 아니 이건 녹색이던가. 군데군데 내가 표현할 수 없는 색으로 벗겨진 청동상. 색의 이름들을 알아둬야겠다.

차가운 색으로 묵묵히 서 있는 투룰과 외젠 왕자 상의 유래를 알 수 없었다. 악기를 다루면 음악이 더 풍부하게 들리듯이, 감독과 배우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더욱 다채로운 영화감상을 할 수 있듯이, 자신이 발 디딘 곳의 역사를 알면 관광지에 이르는 발걸음이 한층 새로웠을 것이다. 여행자의 즐거움에 대한 단상이 여행자의 자격에 대한 망상으로 그 모양을 바꾸었을 때 생각하기를 멈췄다.

부다 왕궁을 대략 둘러보고 언덕을 내려가는 방편을 찾기 위해 마차슈 성당 쪽을 향해 돌아 나왔다.


길가에 늘어선 카페와 식당들이 그늘을 만드는 거리를 마주보는, 탁 트인 교차로에 도착하니 볕이 따뜻했다. 환한 공간에서 주변을 거니는 관광객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팔의 반 정도 되는 길이의 큼지막한 렌즈를 단 카메라를 목에 메고 사진기에 담을 만한 피사체를 찾아 나서는 '나 홀로' 여행객도 있었고, 인생에 더 이상의 롤러코스터는 없을 것 같은, 그만큼 편안한 표정의 노부부도 있었다. 그들은 추운 날씨에도 묘하게 따뜻해 보였다.

교차로 한 쪽에는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었는데 관광객을 태운 도심 투어버스가 서는 곳이었다. 정류장 맞은 편에서 투어버스의 티켓을 판매했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면 언덕을 내려갈 수 있었다. 매대를 지키는 담당직원에게 다가가 버스가 지나는 경로를 표시한 지도를 하나 얻고 하루 동안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샀다.

10여분을 기다려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탄 관광객들의 국적이 다양해 보였다.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단어들이 서로 부딪히며 귀에 들려왔다. 중간중간 내릴 기회가 있었는데, 시간을 곰곰이 따져보니 버스가 서는 관광명소를 하나씩 둘러볼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만족하기로 했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을 유난히 좋아하는 나는, 버스의 경로를 확인한 후 겔레르트 언덕(Gellért Hill, Gellért-hegy)만을 가보기로 정했다. 어부의 성채에서 봤던 낮의 풍경, 겔레르트 언덕에서 볼 야경이 내가 기억할 오늘의 부다페스트를 만들어 줄 것이다.

버스는 언덕을 내려간 후, 세체니 다리, 국회의사당을 돌아 버스의 출발점으로 보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Deák Ferenc tér 근처였다. 안내원이 버스가 손님을 모아 다시 출발하기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았다고 했던 것 같다. 마침 근처 거리에 늘어선 노점상과 상가들이 있어 구경하기로 했다.


상점이 좌우로 펼쳐져 있는 거리의 모습은 여느 도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저 내가 평소 거닐던 곳이 아니라는 자각만이 낯섦과 설렘을 부추겼다. 그 설렘을 즐겼다. 거리 중앙에는 따뜻한 음료와 굴라시(goulash, gulyás)를 파는 노점 카페가 있었다. 바람에 차가워진 속을 덥히고 싶었지만, 굴라시는 겔레르트 언덕 부근에 있는 식당에서 먹어보기로 하고 카페들을 지나쳤다. 붐비지 않는 거리가 좋았다. 적당히 바랜 건물 외벽 색깔이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시간이 되어 버스에 올랐다. 편안한 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자니, 이렇게 편안하게 도심을 둘러볼 수 있는 수단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첫 날 구입했던 교통카드는 필요가 없어졌다. 부다페스트에 다시 온다면 둘 중 하나만 활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버스가 거쳐가는 장소들에 대한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듬성듬성 이해했다. 어느새 겔레르트 언덕에 가까워졌다. 허기가 몰려왔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 식당에 들어가 굴라시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음식을 즐겼다기보다 순간 강렬해진 한기와 허기에 굴복해 맛을 느끼기도 전에 음식의 온도와 스프와 고기덩어리를 흡수했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뒤늦게 맛을 기억하건대, 약간 얼큰하고 짭짤한 맛이 즐기기에 괜찮았다.

식당을 나왔다. 주위가 한층 어두워져 있었다. 기온은 더 떨어져 '다음에 이곳에 온다면 겨울은 꼭 피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겔레르트 언덕에서 야경만 짧게 보고 내려가야겠다 마음 먹었다.


야경은...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넋 놓고 야경을 바라보다, 가지고 간 카메라의 셔터를 한 번, 두 번, 세 번 눌러 봐도,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상 그대로를 절대 담을 수 없었다. 멀리 보이는 부다 왕궁, 그 건물이 뿜는 빛이 마치 어제와 다르고 내일과 다를 어느 날 갑자기 커진 달이 내뿜는 빛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선 손에 잡힐 것도 같은데 카메라에 담으면 이내 초라해지는 그런 빛이었다. 사진기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때를 대비해 구입해 둔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이해하지 못해 그것과 한 몸이 될 수 없었던 내 손을 탓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상의 모습과 그것을 볼 때의 감정을 사진이라는 형태로나마 기어코 남기고자 하는 내 욕망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결코 버릴 수 없을 그 욕심 말이다.

웃음이 나왔다. 그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언젠가 이곳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슬금슬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런 감정이 여행자를 만드는 것인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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