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을까 /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소년 챔프에 '슬램덩크' 원작이 연재되던 1990년대, 농구코트에 모이던 내 주변 아이들은 누구나 강백호,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서태웅 흉내를 냈다. 잡지 연재분을 한창 챙겨보던 것도 모자라 단행본도 차곡차곡 모아 열심히 읽었다. 시간이 흘러 단행본은 중고서점에 판 것으로 기억한다.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그 후 오랫동안 이 작품을 잊고 살았다. 

무슨 연유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몇 년전부터 (역시 내 10대, 20대 시절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불멸의 명작들인) '드래곤볼 풀컬러판', 'H2 소장판', '마스터 키튼 완전판' 등과 함께 '슬램덩크 완전판'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작품들을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그저 그 시절 그 만화들을 읽던 어린 내 모습이 그리웠던 걸까.

 

 

'슬램덩크 신장재편판'

 

 

그러던 도중 스무 권짜리 '슬램덩크 신장재편판'이 나와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판형, 새 표지 일러스트, 적은 권 수 그리고 저렴한 가격이 매력적이었다. 몇 권 모으지 못한 완전판을 처분하고 신장재편판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2020년 늦여름 즈음 스무 권이 모두 모아졌다.

그러고 나서 '슬램덩크'를 오랜만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보았다. 


그 흡인력은 여전했다. 특히 마지막 경기인 산왕전에서, 작품의 모든 에너지가 응축되어 폭발하는 듯한 이야기 구성과 장면 연출은 다시 보니 더 놀라웠고 더 감동적이었다. 

그때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출처: 네이버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올해 초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극장에서 두 번 관람했다. 처음엔 자막판, 두 번째는 더빙판으로 보았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The Birthday의 'LOVE ROCKETS'가 연주되고 인물들이 펜선으로부터 걸어나오는 오프닝에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솟아올랐다. 

기쁨, 슬픔, 흥분, 기대감, 아련함, 쓸쓸함 등이 조금씩 모인 복잡한 느낌. 이 감정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감정을 해석해주는 기계장치 혹은 소프트웨어 같은 것이 있어야 언어로 번역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 시절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린 화면 속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이제 그들 나이의 배 이상의 시간을 살아버린 나 사이의 간극도 요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아주 약간이지만 질투심과 부러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무엇보다 반가움이 가장 컸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원작의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펼치지 않고 작품의 하이라이트인 산왕전을 따로 떼어 소재로 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을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준다면 제일 감상하고 싶은 것이 산왕전이었으니까. 산왕전은 경쟁, 승부, 협동, 성장 이야기의 정수다. 

원작에서도 놀라웠던, 보는 이를 숨죽이게 하는 경기 막판 무음 연출은 영화에서 훌륭하게 재현되었다. 원작 만화의 독자와 기존 TV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들에게도 "처음 볼 때의 설렘을 다시 맛보게 해주고 싶"었다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의도와 부합하게도, 원작을 알고 보아도 어떻게 이렇게 속절없이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는지 불가사의했다. 

 

 

내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나

 

강백호는 산왕전에서 부상을 입는다. 심상찮은 통증 때문에 교체되어 나온 그가 고통을 참아가며 다시 경기에 나서려고 한다. 교체 투입을 반대하는 안선생님을 설득하기 위해 강백호가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은, 나이를 웬만큼 먹은 지금 왠지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말하기 간지럽긴 해도 이 대사를 접하면 내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그 시간은 이미 나도 모르게 지나가 버린 것 아닐까? 

나는 과연 강백호처럼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앞으로 나아간 적이 있었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자신이 원하는 것, 스스로 존재 의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끝없이 도전하려 했던 강백호가 멋지고 부러웠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후로 완전판 원서를 천천히 모으고 있다.

 

 

여전히 또 읽고 싶은, 또 보고 싶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본 후 신장재편판을 한번 더 읽었다. 산왕전 부분만 몇 차례 더 보기도 했다.

요즈음 '슬램덩크 완전판' 원서를 조금씩 모으고 있다. 이번엔 거꾸로다. 마지막 편인 24권부터 구매하기 시작했다. 신장재편판을 모으게 된 이유 중 하나(작은 판형)와는 반대로, 이제는 보다 큰 판형을 소장하고 싶기도 했고 (일본어는 잘 몰라도) 강백호가 아닌 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이야기로도 이 작품을 갖고 싶었다. 

영화의 블루레이 발매 일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다. IMDB '더 퍼스트 슬램덩크' 항목을 보면 북미, 남미, 유럽 일부 국가 등에서 7월과 8월에 걸쳐 개봉이 예정되어있다. 지금으로선 이게 마지막 극장 개봉 일정인 것으로 보인다. 그게 마무리되어야 블루레이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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