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하마터면 목에서 피를 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아침마다 면도날을 사용하기가 망설여진다. 벌써 수년째 해오던 일인데다 지금껏 그런 불상사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요즘은 자꾸 불길한 상상이 든다. 그것뿐인가.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왜 하필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해서야 현관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헛갈리는 걸까. 열쇠를 든 모습은 기억나지만 문을 잠그는 순간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조개 껍질 속 조갯살 빼먹듯 누군가가 내 기억의 그 부분만 쏙 빼먹은 느낌이다. 밤이면 불편한 증세가 하나 더 튀어나온다. 눈을 감으면 곧바로 꿈나라로 가야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어떤 형상이 기괴한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주위가 고요하면 이런 증세는 더욱 심해지는데, 그래서 자기 전엔 라디오나 음악을 반드시 틀어놔야 한다. 몸이 천근만근, 피로가 짓누를 때도 마찬가지다. 이거 병원이라도 가봐야하나.

 


위 사항 중 어떤 것은 내가 겪고 있는 어떤 증세를 있는 그대로 설명한 것, 일부는 약간의 과장을 보탠 것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적지 않은 수가 비슷한 종류의 가벼운 정신적 강박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살아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인간사이의 관계는 톱니바퀴처럼 숨막히게 촘촘해 졌으며 뒤돌아볼 여유조차 찾기 힘든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아무런 흠 없이 완벽하게 제어된 정신을 보유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테니까. 종합병원 지하의 칙칙하고 어두컴컴한 구석에 자리잡은 이라부의 신경정신과를 들락날락 하는 환자들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들이 우리 자신 혹은 주변 사람 그 누군가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현대인의 정신적 불안정함을 아이러니하게도 톡톡 튀는 문체와 가벼운 호흡으로 유쾌하게 묘사한다.

책상 모서리에도 움찔할 정도로 뾰족한 것만 보면 식은땀을 흘리고 호흡이 가빠지는 야쿠자 중간 보스. 경력으로도, 실력으로 봐도 결코 실패할 수 없는 공중그네에서 자꾸만 떨어지는 베테랑 곡예사. 대학병원의 학부장이자 자신의 장인의 가발을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에 몸서리치는 신경과의사. 자기 앞으로 오는 땅볼을 1루에 송구할 수 없게 된 3루수. 원고를 쓸 때마다 언젠가 써먹었던 소재가 아닌가 의심하는 연애소설 전문 여류작가. <공중그네>의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특별한 능력으로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정신적 결손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한눈에 봐도 ‘비호감’인 정신과 의사 이라부를 찾아 이 지하병원에 찾아온다. 왜 이 사람들이 하필이면 이곳에 왔는지 묻지 말자. 의사 이라부는 우리의 평범한 현실인식으로는 결코 도출해낼 수 없는 상상 속 인물이나 매한가지다. 이들이 그의 병원을 찾아오는 것은 소설 속 하나의 운명, 혹은 작가의 즐거운 농간임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환자들을 치료하기는커녕 자기 한 몸조차 돌보기 힘들 것 같은 이 엽기의사의 처방전이 먹혀 든다는 데 있다.

이라부와 그의 충실한(?) 간호사 마유미가 환자에게 처방하는 것은 이 하마 같은 의사의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만드는 비타민주사뿐, 심리적 압박감에 시달리는 방문자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약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이라부는 한눈에 봐도 주변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인물로 이 환자들이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정신적 자유를 획득한 사람이다. 그의 환자들은 하나같이 주변의 요소들에 둘러싸여 심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이들이다. 이를테면 뾰족한 물체에 치를 떠는 야쿠자는 언젠가 저 날카로운 끝이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올 것만 같은 무의식적 두려움에, 자신이 사용했던 소재를 밤새도록 확인해야 하는 여류작가는 매너리즘에 빠져 별볼일 없는 작가로 추락할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모두 사회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로부터 비롯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이라부는 특별한 처방 없이 환자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등장인물들은 처음엔 이 사회에 정말 이런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당황하지만 곧 자신들의 정신적 문제의 근원을 이 뚱보 의사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발견하게 된다.

모든 에피소드가 하나의 드라마처럼 각각의 종결어미를 갖추고 있는 <공중그네>는 적당한 여운을 남기는 미덕도 잊지 않는다. 짧은 옴니버스 드라마를 보듯 쉽고 빠르게 읽히는 이 책의 이야기들은 가슴 속 어딘가를 상실한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희망의 단초를 발견하면서 끝을 맺는다. 설령 이라부의 병원이 결코 현실에 있을 법 하지 않은, 상상 속의 산물이라 해도 괜찮다. 독자들은 굳이 현실의 이라부를 찾아갈 필요 없이 오쿠다 히데오가 만들어낸 이라부의 처방전만으로도 얼마간의 치유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다만 핫팬츠 차림의 미모의 간호사 마유미가 놔주는 비타민 주사를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랄까.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