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 리턴 / Kids Return

갑자기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물론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간의 아픔을 모른체해서도 안되고, 실체 없는 꿈처럼 달콤하기만 해서도 안되었다. 상업영화의 익숙해진 공식에 의해 영화에 끌려 다니는 느낌을 받기도 싫었다. 뭔가 대단한 걸 봄으로써 치유를 받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저 흔하지 않게 마음을 울려주는 영화를 보고 싶었을 뿐이다. 재수없도록 까다롭지만 아무튼 그런 영화가 보고 싶었다.

문득 20대 초반에 보았던 <키즈 리턴>이 떠올랐다. 마침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아련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꽤 오래 전에 본 영화라 마치 햇빛처럼 따사로운 그 엔딩만이 기억났다. 밤의 차가운 기운을 단숨에 잊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안고 가는 햇빛이었다. 절망을 모두 벗어낸 것은 아니지만 결코 멈춰서지 않으려는. 주인공들은 상처받았지만 아직 좌절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느낌이다. 내 기억엔 이 작품, 그 엔딩만큼 희망을 가볍지 않게, 힘있게 암시하는 영화는 없었다.

 


학교로부터 낙오자들로 낙인 찍힌 신지(안도 마사노부)와 마사루(가네코 켄)는 단짝이다. 수업은 빼먹기 일쑤, 선생님 골리기는 취미, 지나가는 아이들 돈 뺏는 게 일과인 얼간이들이다.

마사루는 강한 수컷에 대한 그 또래의 열망을 대변한다. 동급생들을 윽박지르며 돈을 뺏고 권투를 익힌 상대에게 한 방 먹은 후에는 똑같이 권투를 배워 복수하려 한다. 우연히 본 야쿠자 두목의 사람을 다루는 능력에 매료당한 마사루는 힘의 논리에 의해 존중 받을 수 있는 그들 사회를 동경하게 된다.

신지는 그에 비하면 굉장히 수동적인 녀석이다. 마사루처럼 특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떠오르는 타입도 아니고 평소에 말수도 없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한다. 마사루가 나쁜 아이의 전형이라면 신지는 자신만의 꿈이 없는, 그저 교육이라는 정해진 사회화 과정 속 부적응자랄까.

이런 둘은 성장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각기 다른 길로 들어선다. 권투를 배우려는 마사루를 따라 체육관에 등록한 신지는 오히려 관장으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받아 체육관의 유망주로 커간다. 시합은 승승장구, 얼떨결에 시작한 권투가 점점 재미있다. 링에서의 움직임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도구가 되어간다. 어떤 것에도 심드렁했던 신지는 승리의 기쁨과 설렘에 점차 길이 들여진다.

권투도 그만두고 갑자기 모습을 감춘 마사루는 어느새 전에 식당에서 보았던 야쿠자의 막내가 되어 신지와 마주친다. 지금은 얼뜨고 잔심부름만 하는 위치지만 모종의 사건 이후 부하 몇을 거느린 간부가 된다. 그토록 열망하던 수컷의 힘을 획득한 그는 권투로도 맛보지 못했 달콤함을 느낀다. 어깨에 힘을 잔뜩 준 채.

이들이 순진하지만은 않은 인생의 참뜻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거칠 것이 없었던 오르막길은 내리막길도 아닌 절벽에 맞닿아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때로 돌아오는 것은 너무도 간단했다. 단지 가슴에 실패의 쓴 상처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성공을 향한 편법과 지름길을 가르쳐주던 어른들의 세계는 그에 따른 부작용까지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 알려지지 않은 험한 길을 통해 이 두 소년은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애써 목을 부풀리며 어른인체 할 필요도 없다. 신지와 마사루는 어른이 되는 과정을 자연스레 밟아 어른이 되었다.

 

 

두 사람의 재회는 너무나 평온하다. 내면에 차오르는 반가움을 드러내지 않고 둘 사이에 건성건성 오고 가는 대화는 희망을 완전히 잃은 것도, 그렇다고 뭔가를 강하게 기대하는 분위기도 담고 있지 않다. 구태여 내일을 위한 멋들어진 한마디를 남길 필요도 없었다. ‘우리 끝나버린 걸까?’라는 신지의 질문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라는 마사루의 대답, 이 단 두 개의 문구만으로도 모든 건 설명된다.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이 중요하다. 거창하진 않지만 너무도 소중한 희망이다. 내가 <키즈 리턴>을 다시 보고 싶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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