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 Blindness

* 스포일러 포함

이런 말을 계속 해서 안타깝긴 한데 어쩌랴, 각색된 영화의 모든 원작을 일일이 찾아볼 수는 없잖은가. 이럴 때 터무니없이 부족한 독서량을 탓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야만 마음이 좀 놓이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를 봤고, 그래서 원작소설이 이 영화에 가지는 비교우위(당연히)를 측정할 입장이 못 된다는 말이다. 영화를 원작과 분리한 채 영화 자체만으로 보겠다는 구차한 변명.

어느 날 사람들이 하나 둘 눈이 멀어간다. 처음 이 증상을 가진 일본인 환자를 진찰했던 안과의사(마크 러팔로)도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알 수 없는 증세가 옮겨갈 것이 걱정되어 아내(줄리안 무어)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지만 그녀의 눈은 멀쩡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공포스러운 이 현상. 정부는 이것을 접촉에 의해 전염되는 병으로 규정하고 눈먼 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한다. 전염을 두려워하기는 그들을 보살펴야 할 이들도 마찬가지. 눈먼 자들을 수용한 시설은 그야말로 폐쇄된 자치구가 된다.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이들이 나오지 않도록, 혹은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성별, 인종, 나이의 구분 없이 임의로 나뉘어져 몇 개의 방에 배치된 눈먼 자들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약 없이 이 갇힌 병동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데, 앞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 둘러싸인 의사의 아내는 여전히 앞을 볼 수 있다.

 


뚜렷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격리된 그들은 감옥과도 같은 병동 안에서 작은 사회를 이룬다. 작은 숫자로 시작된 군집은 같은 증세의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커져간다. 처음 들어온 그룹에 속한 의사는 곧 1번 방의 대표자가 된다. 이어 다른 방들에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표할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 폐쇄된 장소에 바깥 세상과 마찬가지인 시스템이 적용되기 시작한다. 한쪽에 선량한 자들, 아니 합리적인 공동생활을 추구하며 분쟁을 최소한도로 줄이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이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병동 너머 세계와 똑같이 스스로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집단이 만들어지고 또 그들을 이끄는 이가 등장한다. 식량을 담보로 금품을 뺏거나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려는 악당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넘어 살인에도 거리낌이 없다. 세계의 축소판이 된 격리수용소는 이내 카오스의 공간이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는 현실을 은유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등장한다. 영화(아마도 원작) 자체가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 까닭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작은 사회가 현실에서 폭력이 가장 먼저 가 닿는 대상이 여성임을 드러내거나, 무능한 정부로 대표되는 시스템의 붕괴가 공동체의 와해를 야기한다는 것, 혹은 의사의 아내가 그러하듯 행동하는 지도자가 집단을 희망의 미래로 이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진짜 목적이다. 눈먼 자들은 시각을 상실함으로써 현명한 판단에 필요할 하나의 도구를 잃었으며, 더불어 갑작스럽게 닥친 위기는 그들이 모조리 이기적인 존재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마치 수많은 미디어에 둘러싸여 오히려 진실을 드러낼 방법을 잃어버린 현실의 우리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줄곧 인간사의 지옥도를 보여주며 달려온 영화의 마지막은 의외로 굉장히 희망적인데, 그럼에도 보는 이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그려진 인간들의 사회는 사실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다. 단지 조금 농축되고 과격하게 묘사되었을 뿐. 어쩌면 그들이 시각을 되찾는 사실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현자의 그것처럼 들리는 애꾸눈 노인(대니 글로버)의 목소리가 조용히 현실을 관조하며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는 효과가 있지만,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인간의 온갖 추악함을 경험한 등장인물들은 그곳에서 동물과도 같은 생존력을 체득했고 바깥세상은 이미 동물의 세계가 되었다. 앞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인간성의 회복으로 이어질까. 영화는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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