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호라이즌 / Event Horizon (1997)

우주만큼 공포심을 유발하기에 적당한 공간은 없다. 그곳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직 체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앞으로도 결코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낯선 것으로부터 불안을 느낀다. 또 아직 알지 못하는 대상으로부터 두근거리는 흥분을 얻기도 한다. 우주는 바로 그런 대상이다.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그런 공간. 그것은 긴장을 유발하고 보는 이를 집중하게 한다. <이벤트 호라이즌>은 이 특정 공간이 불러 일으키는 공포를 다룬다. 우주 저 너머에 지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 또 그 지옥을 경험한 우주선이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는 설정이 <이벤트 호라이즌>의 시작이다.

<이벤트 호라이즌>은 <레지던트 이블>과 <데스 레이스>, <모탈 컴뱃>과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등의 영화를 통해 게임과 영화의 경계선을 지우는데 몰두해 온 감독, 폴 W.S. 앤더슨의 1997년 작품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비교적 전통적인 형태의 공포나 스릴보다는 쾌감을 동반하는 액션을 영화의 중심에 두는 감독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인간성이 제거된 괴물인 좀비의 육체나 그 자체로 외계인인 에이리언과 프레데터의 신체를 가차없이 파괴하면서 관객에게 죄의식이나 거부감으로부터 살짝 빗겨간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데스 레이스>에서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서 직접 다룬다. 물론 흉악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이라는 설정으로 마찬가지의 효과를 노려보지만 말이다.

 


그가 다루는 소재들이나 필모그래피는 이런 영화의 스타일이 단지 선정성과 오락성의 비율을 적절히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것이 명백히 관객의 욕구를 채워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 수많은 FPS게임이나 호러게임에서 직접 목표물을 산산이 부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영화는 그런 경험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벤트 호라이즌> 역시 인간의 육체를 마치 해체되는 실험동물처럼 다루는 장면을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 뒤편에 은근히 풍겨오는 공포에 더 초점을 맞추는 영화다. 관객으로 하여금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을 긴장된 눈길로 바라보게 하는 이 영화는 공포영화의 관습을 적당히 따르고 있다. 암흑 속의 악령을 암시하듯 누군가가 등장인물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카메라의 시점, 예고 없이 갑자기 삽입되는 끔찍한 이미지들, 악몽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결말부분의 작은 반전(?) 등은 비슷한 장르 안에서 많이 보아온 만큼 그리 독창적이거나 신선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주가 가지는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이 영화에 분명히 존재한다. <이벤트 호라이즌>을 보며 소재와 방식은 달라도 우주라는 배경 속에 마찬가지로 불안에 떠는 등장인물을 배치하는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이나 대니 보일의 <선샤인>(물론 <이벤트 호라이즌>의 후에 제작된 영화이지만)이 연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우주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설명되지 않는 공포를 담고 있다. <이벤트 호라이즌>도 보는 이를 불안한 어둠 속으로 서서히 이끌어간다. 적어도 이 영화가 다소 맥이 빠지는 결말 부분에 이르기 전까지 조성하는 긴장감은 인상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른바 ‘저주 받은 집’으로부터 모티브를 가져와 우주선이라는 특정 공간을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묘사해나가는 전반부에 비해 악령에 사로잡힌 인간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는 후반부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영화의 후반부가 잔인한 이미지들을 마음껏 펼쳐놓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미리 본듯한 익숙함을 안겨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악령이 깃든 캐릭터들이라면 오컬트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통해 그 동안 참 많이도 봐왔으니까. 더구나 막판에 등장하는 이른바 ‘지옥의 대리자’의 메이크업은 좀 엉성해 보여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벤트 호라이즌>은 폴 W.S. 앤더슨의 영화세계 안에서 꽤 돋보이는 영화다. 이후의 그의 영화세계는 쉽게 말해 게임패드의 버튼을 누르는 쾌감을 어떻게 스크린 안에 구현해 낼 지에만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이벤트 호라이즌>은 적어도 그런 영화는 아니다. 여기엔 다소 관습적이긴 해도 관객을 놀래는 지점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잘 축적되어 영화에 대한 일정한 호감을 이루기도 한다. 또한 영화의 축을 이루는 두 배우, 로렌스 피쉬번과 샘 닐의 듬직한 연기도 영화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후의 영화들을 통해 좀비, 외계인, 또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열심히 사지절단 내버리는 사이 그가 잃은 것이라면 <이벤트 호라이즌>에서 보여준 영화적 긴장감 같은 요소일 터이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즐겨 봤지만(<레지던트 이블>은 정말 재미있게 봤다) 보고 난 후 언제나 씁쓸하고 허전한 뒷맛을 느낀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말 은막 위에 게임을 연출해내려는 것일까. <이벤트 호라이즌>은 그런 영화 외적인 이유, 즉 이 영화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점 때문에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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