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트 / Doubt (2008)

* 스포일러 포함

이 카톨릭 학교의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그는 종교가 중세시대처럼 공포와 단절의 공간이 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을 지역사회와 함께 가져가길 원한다.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는 동료신부들, 학생들과 농담을 즐기는 이 신부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녀는 학생들을 향해 절대 미소 짓지 않는다. 아이들은 철저히 훈육의 대상이며 목적에 우선되는 규율의 적용대상자들이다. 학교의 젊은 수녀이자 역사교사인 제임스(에이미 아담스)는 어느 날 수업 중 플린 신부와 만나고 온 한 흑인학생의 이상한 행동을 목격한다. 아직 인종차별이 심각했던 시대에 학교의 열린 방침을 보여주듯 받아들인 그 학생의 이름은 도널드(조셉 포스터). 플린 신부를 존경하며 신부의 꿈을 꾸는 아이다. 제임스 수녀는 이와 함께 미심쩍은 플린 신부의 행동까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보고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신부와 학생의 관계를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를 학교에서 몰아낼 궁리를 한다.


연극원작을 각색한 이 영화는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연기대결이 볼만한 작품으로 선전된다. 영화를 보기 전, 그 설정과 이야기, 그리고 캐릭터 자체보다 배우들의 능력이 우선되는 영화라는 선입관이 생긴다. 원작이 연극인 작품답게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도 한정되어 있다. 1964년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어느 카톨릭 학교에서 벌어지는 주임신부와 교장수녀의 갈등이 이야기의 전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내 안의 의심. 엄청난 대사량만으로 묘사될 이 이야기를 요즘처럼 비주얼과 스타일이 중시되는 영화들 가운데 흥미롭게 보게 되리라 기대할 이유는 없다. 평소 연극과 연극적 형식의 영화들 모두에게 그다지 친밀감을 느끼지 못해온 터였다. 배우들의 입을 통해 쌓아 올려지는 수많은 대사들에 깔리지 않길 바랐다. 졸지 않으면 다행이다. 영화 <다우트>를 향한 개인적인 걱정과 의심의 눈초리.

 


그러나 인물의 성격을 구축하는데 소비하는 초반부를 잘 견뎌낸다면 관객은 이내 <다우트>가 공허한 철학적 푸념들을 늘어놓는 영화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영화의 테마인 의심은 배우들의 대사들을 통해 이리저리 떠돌다가 끝내 영화를 보는 이의 머리 속에 안착하게 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정확한 물증 없이 플린 신부를 의심한다. 관객 역시 그를 의심한다. 미심쩍은 부분들이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부의 태도는 더욱 불가사의하다. 기본적인 진술(예, 아니오) 외에 그 어떤 변명 없이 사태를 돌파하려 한다. 교장수녀의 불신은 깊어가고 관객 또한 이 불신의 감정에 동참한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반대로 얘기하면 의심하고 싶을 때 의심한다. 그것은 알로이시스 수녀와 도널드의 모친의 대화(라기 보다는 격론에 가깝다)를 통해, 그리고 영화의 결말을 통해 모든 것이 불확실한 <다우트>에서 가장 확실한 명제가 된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 신부를 의심한 것은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증 없는 심증을 바탕으로 한다. 그 심증 또한 결백한 확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엄격한 알로이시스 수녀는 자유로운 사고의 플린 신부가 못마땅하다. 그녀는 그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의심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품는 회의. 그 대상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의심을 확신으로 만드는 것은 주어진 증거들이 아니다. 영화 속 알로이시스 수녀로부터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해도 놀라지 마시라. 사람들은 의심할 대상을 여전히 의심하기 위해 사실을 가공하는 행위조차 서슴지 않는다. 믿음과 의심의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우리는 믿고 싶을 때와 의심 하고 싶을 때 모두 그것이 불명확한 시작점으로부터 출발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영화 <다우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푸는 시점에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어느새 배우들의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격렬히 논쟁하는 신부와 수녀가 보일 뿐이다. 그런데 영화가 시시할거라는 사전의 의심이 사라지는 순간 관객은 더욱 혼란스럽다. 내가 지금껏 의심해왔던 행동은 과연 정당했나. 그것은 모두 확신과 동의어였을까. 영화가 시작된 후 첫 미사에서 플린 신부는 의심이 스스로의 결속을 다진다는 이상한 설교를 한다. 아마도 그것은 성장과 유의어였을 것이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영화의 마지막에서 회의 속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가리키는 지점도 바로 그곳이다. 그래도 여전히 의심해 볼 것이 남아있다면 그 대상은 외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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