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시체가 발견된다. 옷은 벗겨져있고 지문은 모두 지워진 상태. 얼굴도 신원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망가져있다. 그러나 단서는 남아있는 법. 피해자가 사용한 듯한 자전거에서 지문이 발견된다. 자전거는 도난 된 것으로 판명되고 근처엔 소각되다 만 피해자의 옷가지가 있다. 갑자기 사라진 투숙객을 의심스럽게 여긴 어느 여관주인이 신고를 해와 경찰은 지문을 대조해본다. 일치한다. 피해자의 이름과 직업, 과거가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온다. 이제 밝혀진 단서들을 조합해 범인을 잡아내야 한다. 죽은 이와 관련 있던 사람들을 검색하고 살해동기가 있을 법한 인물들을 추려낸다. 범인은 언젠가 밝혀지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은 마치 콜롬보 형사의 수사일지에서처럼 독자에게 범인을 미리 알려주며 시작한다. 이 추리소설을 읽는 이는 범인이 누굴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아직 범행의 과정이 완전히 파헤쳐지지 않은 상태에선 용의자일 뿐인 그들이지만 독자는 그들이 범인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범인이 누굴까 골똘히 고민하게 하지 않는 대신, 앞에 나열된 범행의 상상도를 한번 의심해보라고 주문한다. 살해의 순간은 그대로 드러나 있지만 이후 그것을 감추기 위한 용의자들의 행동은 생략되어 있다. 과연 드러난 단서들은 믿을 만 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범인은 어떻게 그 단서들을 비틀어 놓았을까. 추리소설이 흩어진 요소들을 짜맞추는 과정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끼는 수수께끼라면 <용의자 X의 헌신>은 범인이 아닌 범행이 그 대상이 된다.



범죄의 과정을 되짚어 가는 것은 소설 속 두 축을 이루는 인물인 수학교사 이시가미와 물리학자 유가와가 담당한다. 이시가미는 용의자 측에서, 유가와는 경찰을 도와주는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이시가미가 숨기면 유가와는 그것을 파헤친다. 겉모습은 달라도 비상한 논리력과 추리력으로 무장한 두 사람. 공교롭게도 대학동창인 두 천재는 마치 서로 수학 문제를 제출하고 풀어내듯 범행의 개요를 주고 받는다.

두 사람의 추리 공방이 추리소설로서의 <용의자 X의 헌신>을 완성한다면, 그 배경엔 뒤틀린 러브스토리가 숨어있다. 소설의 제목이 알려주듯 여기엔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헌신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의 결말부에 이르러 사건의 정황을 거의 파악할 때쯤, 독자는 안타까움과 끔찍함이 공존하는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것은 마치 불행해선 안 되는 인물들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불행의 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아무 힘없이 지켜보는 듯한 감정이다. 그러나 범죄는 범죄, 죄값은 치러진다. <용의자 X의 헌신>은 범죄에 대한 윤리적 입장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용의자의 ‘헌신’은 더욱 안쓰럽다.


소설은 빨리 읽힌다. 작가의 군더더기 없는 묘사와 친절한 설명으로 단숨에 결말까지 달려간다. 다만 사건 자체보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간들 간의 관계에 좀더 이야기의 무게가 실려있어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는 다소 덜한 편이다. 주인공의 ‘헌신’의 이유가 여운을 남기긴 하지만 그 비현실성이 좀 버거운 것도 사실이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개운하지 않은 뒷맛을 남기는 것은 마치 코난이나 김전일의 사건파일을 엿볼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끔찍한 범죄의 범인들은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안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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