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 Transformers : Revenge Of The Fallen (2009)

눈 앞에선 변신로봇들이 화면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폼 나는 스포츠카나 날쌘 제트기가 그 수만 개의 부품들을 정교하게 움직이며 위풍당당한 거대로봇으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두근두근하다. 어린 시절 마징가 Z, 혹은 태권브이의 조종석을 노렸던 그 코흘리개 소년은 범블비를 가진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가 얄밉도록 부럽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활한 옵티머스 프라임이 보다 강력한 파츠로 무장하고 폴른을 박살(!)낼 땐 영화 속 선과 악을 나눈 완벽한 이분법의 고루함 따위 잊은 지 오래다. 다 자랐다고 믿었던 소년은 어느새 화면 속 로봇 안에 들어 앉은 여덟 살 무렵의 자신의 모습을 본다.



블록버스터는 더욱 더 노골적으로 거대함을 앞세운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고질라>로 사이즈의 중요함을 역설할 때만해도 막상 실체를 드러낸 그 어색한 몰골에 실소를 참지 않았던 관객들은 이제 꼼짝없이 스크린 속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막대한 자본을 들인 영화가 상상했던 그대로, 혹은 그 이상의 것을 화면에 펼쳐놓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뿐 아니라 휴식을 취하러 온 극장 안에서조차 자본의 위력에 입을 떡 벌릴 수 밖에 없게 된 거다. 열고 보니 싸구려였으나 마음만은 명품이고자 했던 <고질라>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크기를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은 그렇게 보는 이를 압도한다.


덩치만 큰 영화들을 이야기 할 때, 이제는 이미 하나의 관습이 된 “보고나니 남는 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시효성을 잃었다. 초등학생의 상상력이 그대로 실현된 듯한 엉성한 스토리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유치한 대사들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하는 것은 그 ‘남는 게’ 없는 ‘순간’의 비주얼이기 때문이다. 장면장면은 관객에게 변신중인 로봇의 구석구석에서 요란하게 움직이는 부품들을 하나하나 포착할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지나간다. 뭔가 상상하기 힘든 일이 눈 앞에 일어났는데 보는 이는 그것을 확인하기도 전에 다음 장면에 집중해야 한다. 툭 하면 신체를 절개해 각 부위들의 역할을 바꿔버리는 로봇들의 정교한 움직임을 더 이상 놓쳐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결론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뭔가를 정신 없이 쫓아왔는데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조차 그것이 뭐였는지 확인이 안 되는 상태. 그러니 남는 게 없는 건 당연하다. 다시 말해 그건 관객들의 이성이 아닌 감각기관만을 자극하길 원하는 이 조물주들의 전략이다.

그렇게 우리는 블록버스터의 전략에 꼼짝없이 당하고 만다. 손에 쥐지 못한 실체 없는 환상이야말로 이들의 가장 큰 무기다. 한 줄로도 요약하기 쑥스러운 내용은 뒷전인 것이 사실이다. “뭔가 엄청난 걸 봤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냥 변신로봇이야. 근데 굉장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감상자들을 보며 저들은 웃고 있을 거다.


근데 어쩌랴. 그런 그들이 얄밉더라도 어린 시절 TV에 등장하는 로봇들의 파일럿으로 가상의 이력을 채운 적이 있는 이 다 큰 아이는 옵티머스 프라임의 다음 활약이 못내 기다려 지는 걸. 아, 그러나 제발 샘 윗위키에게 그 멍청한 대사들로만 점철된 스크립트를 전하지만 말아줬으면. 차라리 로봇 안에 들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게 어떨지. 그리고 그 비장한 척 하는 자브론스키의 음악도 좀. 자본의 주인이니만큼 세계를 구하는 미국의 모습은 방법 없이 볼 수 밖에 없더라도 희생, 숭고 따위의 간지러운 분위기 말고 좀 더 경쾌하게 갈수는 없는 거냐고. 영화 속에서 니들이 구세주인 건 아는데 좀 신나게 꾸며주면 어떻겠냐고 하는 이 소년의 마음, 좀 이해해주면 안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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