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씹어 삼키기

마음 같아선 피곤에 뻗어 누운 밤 시간, 머리맡에 둔 한 권의 책 내용을 동 트기 전까지 뇌로 자동 전달해 주는 기계를 발명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하루 종일 시달리다 이 고요한 시간만큼은 휴식을 취하고픈 뇌의 고충을 외면하기 어려울뿐더러 마치 인체를 활용한 데이터전송 같은 비인간적인 개념을 떠올렸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심으론, 뇌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인간의 신체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누군가 그런 기계를 만들어 준다면 잘 써줄 의향은 있다. 물론 구매 시 무이자 할부 6개월을 넘기지 않아도 될 만큼 가격 장벽이 낮을 때의 이야기겠지만.


책 읽을 시간, 더 정확히는 그럴 마음의 여유를 찾지 못하겠다는 유치한 투정을 해보려다 이런 어이 없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부질없는 핑계다. 조각조각 그러모아 뭔가를 이뤄나갈 자투리 시간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저 동시간 대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평온함이나 시간가는 줄 모르는 인터넷 서핑, 혹은 퉁겨도 퉁겨도 늘지 않는 기타를 품에 안는 쪽을 우선 선택한 스스로를 탓하기 싫을 뿐이다.



이러저러하다 책에 대한 글을 올리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잘 생각해보면 영화나 음악에 대한 글을 적는 것보다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만족감이 큰 듯하다. 아마도 영상이나 음원으로부터 받는 감상을 활자로 옮기는 것에 비해 활자에 활자로 대답하는 편이 좀 더 수월하기 때문이겠지. 그에 비해 영화와 음악을 말로 풀이하는 행위는 좀 더 소모적이다. 간혹 뜬 구름 같을 때가 있다.

뭔가를 읽고 그것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남겨 놓지 않을 때 마음 한구석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독서일기’ 따위를 쓰나 보다. 때론 여행지의 풍광을 진심으로 즐기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보여줄 심산으로 기껍지 않은 사진을 정성 들여 찍는 여행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떠오르기도 한다. 혹 내가 쓰는 글들은 단지 그 책들을 읽었다는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무의식적으로 누군가에게 전시하려는 의도가 베어있는.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책을 좀 더 정독하고, 눈에 띄는 문장들을 섭취하고, 사고의 지평을 넓혀줄 사상들을 습득하면서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조금 더 확실하게 빨아들이고 싶다. 그런 행위가 가능하다면 내 앞에 풍요롭게 쌓인 채 읽어줄 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이 녀석들을 잘 씹어 삼키고 싶다. 달콤 짭짜름 담백 매콤한 맛을 느끼며 위장에 넣어 천천히 소화시킨 후 내 몸 구석구석으로 보내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고 싶다.

그러려면 한번 삼키기로 마음먹은 책은 소화를 잘 시켜야 한다. 정독해야 할 책을 속독으로 씹어 소화불량에 걸리거나 저자의 생각을 편견과 얕은 지식으로 비롯된 오독으로 설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글쓴이가 고민해 세상에 내놓은 내용들을 차분히 곱씹어보고 내 생각과 견주어보며 책과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앞에 쌓인 책들, 저 안엔 앞으로 내가 맛볼 새로운 문장과 생각들이 즐비하다. 저들을 급하지 않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어 넘기는 것이 올해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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