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환상의 책 - 8점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죽음과 삶, 끝과 시작, 그리고 생의 완결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는 하지만, 영혼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은 어쩌면 마음 안 쪽 지하실 구석 어디쯤에 그 아픔을 숨겨두는 것을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슬픔이 눈앞에 바로 펼쳐질 듯 생생한 위치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물러서듯 아래로 옮겨지고 있으나, 마치 영원히 폐기할 수는 없는,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더라도 맘 속 지하실 구석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다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그 아픔은 자신의 존재를 이 세상 속에서 지우지 않는 한 언제나 그 계단들을 거슬러 올라올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그 동기가 무엇이 될지, 또 그 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삶과 죽음을 가늠하고 그 안에서 어떤 영감을 받는 것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이는 남겨진 사람들뿐이니까. 그들의 탄생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생의 완결은 현세에서 그들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채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대신 지어주는 매듭이다. 그렇다면 존재와 사라짐 사이를 명확히 구분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떠난 자들이 세상에 남긴 족적? 만약 그것이라면, 그들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 그들이 남긴 행위라면, 그것을 타인에게 전해줄 이는 과연 누구인가? 한 발 더 내딛어, 사라진 이들의 흔적을 전해줄 이 조차 없다면 과연 그 존재는 실존했던 것일까?

『환상의 책』의 안에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 그 책을 쓰고 있는 작가인 데이비드 짐머는 죽은 이들이 그에게 남긴 슬픔, 결코 지울 수 없어 언젠간 마음 속 계단을 다시 올라올 아픔을 그대로 물려받은 동시에 떠난 자들의 시작과 끝을 완전하게 매듭질 역할을 부여받았다. 단지 그들과 관계되고,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의 인생에서 거쳐 가는 아주 중요한 사람들은 하나 둘 그에게 무거운 짐을 던져주며 사라져 간다. 비행기 사고로 죽은 아내와 두 아이가 그랬고, 그로부터 생의 희망을 상실한 짐머에게 다시금 삶의 시작을 던져준 헥터 만이 그랬으며, 또 다른 희망으로 다가온 앨머조차 이 두 번째 중요 인물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그 행렬의 마지막을 이루었다.

짐머가 헬렌과 토드와 마르코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연결하지 못하고(어찌 그럴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어쩌면 짐머 자신을 겨냥한) 공격적인 시선으로 그 세월들을 헤매고 있을 때, 1920년대의 코미디 영화배우 헥터 만이 던져준 웃음은 그를 새로운 도피처로 이끈다. 삶의 의욕을 오로지 한 명의 희극 배우의 족적을 추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짐머는 의문스럽게 사라진 한 배우의 삶의 흔적을 좇는다.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 그곳에는 존재의 사라짐을 만회할 새로운 삶의 희망이 비춰지고 있을까, 아니면 생의 시작으로부터 다시 출발해 결국엔 똑같이 존재의 사라짐으로 막을 내릴 그저 또 다른 연결고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환상과 현실, 책과 독자, 그리고 또 다른 시작

철저히 불행해 보이는 이 가련한 작가의 여정은 온통 삶과 죽음의 자갈밭 투성이다. 그것은 쉽사리 연결될 것으론 보이지 않는, 적어도 그의 행보를 외부에서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한 사람의 성인남자가 감당하긴 힘들어 보이는 무거운 시작과 끝이다. 짐머 자신이기도 하고 그를 대신해 우리에게 『환상의 책』을 들려주기도 하는 폴 오스터는, 책과 독자의 세계를 환상과 현실의 경계, 존재와 사라짐에 대한 고민과 맞물려 펼쳐 놓는다.

꼭 있었을 법한, 그래서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라면 반드시 그 이름을 찾아 실존의 증거를 확인하고픈 헥터 만이라는 배우를 중심으로, 이 책은 때로는 디테일한 짐머(오스터)의 묘사방법에, 때로는 끝을 알 수 없는 희미하고도 미스테리한 극의 흐름에, 그리고 때로는 책 속의 환상과 나의 현실을 마주보게 하는 오스터의 마력에 우리를 던져 놓는다. 그것은 그리 유쾌하지도, 명쾌하지도 않아서 한동안 머릿속을 이리 저리 떠다니는 부유물 같은 느낌이지만, 한편으론 그것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불평할 수 없는 그런 독특한 쾌감을 선사한다.

어느새 짐머에 동화되어 한없이 펼쳐진 절망에서 나오지 못할 것만 같던 우리는 결국엔 짐머의 불확실한 마지막 희망에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기 전 우리에게 남겨진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 몇 페이지를 본 이상 우리는 짐머의 죽음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은 우리(책을 읽은 한 사람의 독자)가 그의 시작과 함께 끝을 알게 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짐머는 분명 『환상의 책』 속에 존재했지만, 어쩌면 아무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환상이고, 그 환상의 출발과 마지막을 인식하는 것은 현실의 나뿐이다.

그의 가족과 헥터 만과 앨머에 대해 데이비드 짐머가 그랬듯이, 폴 오스터는 『환상의 책』을 통해 삶과 죽음을 스스로 한번 이어 놓고,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또 다른 연결고리를 쥐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나 혼자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문제다. 단지 이런 식으로, 이런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또 다른 이에게 그 고리의 일부를 넘겨주는 것으로 마음의 부담을 조금 줄일 수 있을 뿐. 자, 당신은 내가 오스터로부터 건네받은 시작의 고리를 매듭지어 줄 바로 그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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