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백인들 (마이클 무어)

세계 초강대국이라는 바늘방석에 앉아,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저 수많은 나라들의 정치와 경제, 전쟁에 간섭하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크십니까. 자국 내에서도 사격이나 무기에 관심도 없는 선량한 사람들이 총에 맞아 돌아가시는 일들이 많은 판국에 스스로 나서서 전 세계의 경찰 노릇을 자처하시는 점. 더구나 그 넓은 오지랖을 펼쳐 타국 국민들의 안전을 걱정해 주시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세계의 균형을 임의로 재편하기 위한 경제적, 정치적 압력과 검은 기름을 둘러싸고 벌이는 일이라는 소리도 들리지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높고 고귀하신 큰 나라의 의도를 이토록 폄훼하다니요, 아마도 저 목소리들 뒤에는 누군가가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아, 근데 이 친구는 또 누구입니까. 그토록 아름다워 이름에도 아름다움이 새겨져 있는 그 크신 나라에 제 살 깎아먹으려고 작정한 이 건강하지 못한 친구는 뭐란 말입니까. 책 제목도 <멍청한 백인들>? 허허, 스스로 낮추지 못해 안달인 친구로구만. 잡피라도 섞이면 모조리 유색인종이라 칭할 만큼 순수혈통을 강조하는 진정으로 순수한 종족을 저런 파렴치한 단어로 수식하다니. 이 친구 가도 너무 간 거 아닙니까.



가도 너무 간 건 마이클 무어가 아니라 미국, 아니 그가 지칭하는 ‘멍청한 백인들’이다. 언제나 정치적 견해 가득한 다큐멘터리로 조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마이클 무어는 <멍청한 백인들>을 통해서도 역시 건강하지 못한 미국의 실상을 파헤친다. 이 책은 핵심은 저 텍사스 출신의 낙제생, 알코올중독자, 전과자였던 부시가 어떻게 백악관 안의 주인자리를 얻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부시와 고어간의 대결은 매우 똑똑한 참모들과 주변인들을 둔 부시일당들의 승리로 끝맺는다. 2000년 미대선의 결과였다. 당시 선거의 접전 지역이자 논란의 중심지였던 플로리다가 그 무대로, 책을 통해 부시일당이 승리를 위해 저지른 행위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시 플로리다의 주지사이자 조지 부시의 동생인 잽 부시는 전과 혐의가 있었던 사람들을 유권자 명단에서 제외시켜 자연히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성향이 강한 흑인유권자들의 수를 대폭 줄였다. 플로리다의 규모가 큰 어느 지역의 경우 무려 60퍼센트 이상의 흑인들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 이때 범법과 별 관련이 없이도, 전과자들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제외된 사람들도 있었다.

철저한 사전작업으로 부시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가 싶었던 개표결과는 민주당의 이의제기로 재개표에 돌입하지만 역시나 결정적인 마지막 개표가 이루어지기 전에 부시 쪽 인사들이 포진된 대법원의 명령으로 재개표는 중지된다. 사실 이 사건에는 유효표에 대한 기준의 모호함, 부재자 투표를 둘러싼 논란 등 수많은 문제점이 산재해 있었지만 어쨌든 유머감각 하나는 풍부한 텍사스 출신 전(前)대통령의 아들은 결국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으로 논란은 마무리된다. 마이클 무어는 이를 장난 반 진담 반의 심정으로 ‘순 미국식 쿠데타’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미국식 쿠데타는 몇 년 후 이라크에서 수천 명의 자국 군인들을 다치게 함은 물론 수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상자를 만들어내고 만, 미국 외의 나라에도 영향을 미치는 쿠데타가 되어 버렸다. 단지 중동지역에서의 세력확대와 국방예산을 늘리기 위해 911 테러가 낳은 국민의 분노를 담보로 삼으면서까지 말이다.

그러나 책을 통해 드러난 ‘멍청한 백인들’의 영향력은 이것 말고도 미국 내의 여러 가지 사안에 닿아있다. 이들은 공공교육에 투입되는 국가예산을 줄임으로써 사회적 하층민들의 교육기회를 박탈하는데, 이는 특히 가난이 대물림 되는 유색인종 미국민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기업들의 로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치인들은 이 공공투자의 방법 대신에 학교와 기업을 이어주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코미디 같은 일이 발생한다. 코카콜라가 후원하는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이 펩시 티셔츠를 입고 등교했다가 정학을 맞는가 하면, 바다 기름 유출로 심각한 생태계 문제를 일으켰던 회사가 그들이 후원하는 학교 학생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비디오를 틀어주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사이 그들이 경영하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라는 광고와 함께.

이들은 학교 말고도 공공기관이나 공공사업에 대한 투자를 철회하거나 줄임으로써 자연히 사회복지에 쓰여야 할 재산들이 제약회사 등의 로비자금으로 둔갑해 정치인 개개인의 배를 채워주는 데 흘러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정치적 진보 노선을 자처하는 민주당도 마찬가지여서 마이클 무어에 따르면 공화당 혹은 부시 일행이 멍청하게 대 놓고 이런 짓들을 저질렀다면 전임자인 클린턴을 비롯한 민주당은 똑똑하게도 눈에 안보이게 이 사안들을 처리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자국내의 부조리함은 이들이 세계에 끼치는 해악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측근들의 등에 업혀 흰 기와집에 입성한 부시는 이후 이산화탄소 방출 제한을 위한 EU와의 협상 파기, 남미에서의 마약과의 전쟁 가속화 부채질, 북한과의 관계 악화로 긴장감 조성,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 계획으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 등 세계와의 비타협 정신으로 똘똘 뭉친 행동으로 일관했다. 물론 스스로는 다른 국가들에게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사실 ‘멍청한 백인들’은 어디까지나 먼 나라 미국의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마이클 무어의 의도가 시사하는 바는 결코 거기서 멈춰있지 않다. <멍청한 백인들>은 언론과 국민들이 국가의 꾐에 넘어가거나 그 견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불행을 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춰 재치 있게 풀어내고 있을 뿐이다. 즉 이런 일들은 우리나라를 비롯 미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권력과 이익을 위한 집권층의 결속력은 강력해서 만약 국민이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는 권리의 영향력을 망각한 채 그저 넋 놓고 있는다면 결국 자신들에게 돌아올 혜택들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마이클 무어는 이를 강조하듯 책의 곳곳에 아주 가볍게 실천할 수 있는 잘못된 국가에 대한 ‘딴지방법’ 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몇몇은 우리나라에서도 응용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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