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아사다 지로)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이다. 영화 <파이란>을 보고 원작을 읽고 싶어 들춰본 책이다. 책 속엔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철도원>이 첫 번째로, <파이란>의 원작인 <러브 레터>가 두 번째 이야기로 실려 있다.

<파이란> 뿐 아니라 <철도원>도 영화로 먼저 접했다. 한때 히로스에 료코를 참 좋아해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 드라마 등을 보곤 했는데 <철도원>도 그 리스트에 끼어 있었다. 영화 <철도원>은 그러니까 아사다 지로나 다카쿠라 켄의 이름값 덕분에 본 건 아니었다.

영화를 본지가 오래되어 세밀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역사의 따뜻한 난로 곁에 앉아 흰 눈이 쌓인 철로 주변을 가만히 바라보는 듯한 포근한 분위기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전해지는 뭉클한 감정은 영화나 원작소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영화는 소설의 장면 장면을 충실히 화면에 담으려 했던 것 같고, 아사다 지로의 문장 또한 머릿속에 금세 이미지로 떠오를 만큼 생생하다.



매체는 달라도 앞의 두 이야기를 미리 접한 까닭일까. 아무래도 익숙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이 단편집의 대표선수 격인 <철도원>을 지나 또 하나의 영화원작소설인 <러브 레터>를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단편집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 마지막 페이지에 닿을 때까지 거쳐가는 남은 일곱 편의 이야기 모두 쉽게 지나치기 힘든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이어지는 세 번째 이야기 <악마>는 앞의 두 이야기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소설이다. 괴기소설이 가질 법한 으스스함에 아사다 지로의 유년의 경험이 적잖이 녹아 든 듯한 이 이야기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나’가 새로 고용된 대학생 가정교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가정교사가 주인공을 가르치기로 정해지면서 이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엔 제목처럼 악마를 상징하는 듯한 인간이나 동물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꼭 있는 그대로를 의미한다기보다 집안의 몰락을 겪었다는 아사다 지로의 어린 시절에서 어두운 면만을 떼어내 형상화한 대상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많다. 죽은 딸이 찾아오는 <철도원>도 그렇고 소설 속 낱말이 일그러지며 괴기한 형상으로 변할 것만 같은 음침함이 매력적인 <악마>도 그렇다. <악마> 다음으로 등장하는 <츠노하즈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교이치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당숙의 집에서 길러진다. 부모 못지 않은 정성으로 자신을 길러준 당숙과 당숙모의 존재, 그 집안의 딸이자 현재 자신의 부인인 구미코의 헌신적인 마음 씀씀이는 결코 남부럽지 않은 것이었지만, 마음 속엔 언제나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이 남아있다. 소설은 중년의 주인공이 회사의 해외발령 명령으로 일본에서의 일상이 며칠 남지 않은 현재가 배경이다. 현재와 회상이 교차하면서 그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따뜻함이 독자 앞에 하나 둘 드러난다. 여기에 경쟁사회에서 내쳐진 차가운 현실과 아버지와 관련된 어두운 기억도 함께 맞물린다. 일본을 떠나기 전, 교이치의 마지막 남은 소원은 생사도 모르는 아버지와의 재회. 그런 교이치의 앞에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그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과거 아버지와 똑 같은 옷차림을 한 이 사람.

이후 단편집엔 과거 의류사업을 했다는 작가의 경험을 십분 살려 집필한 것이 분명한 <캬라>, <철도원>과 <츠노하즈에서>에 이어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리는 <백중맞이>, 짧은 길이의 이야기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하는 <메리 크리스마스, 산타>, 위기에 봉착한 중년의 부부가 유년의 추억을 거슬러 올라 관계회복의 첫 걸음을 떼는 <오리온 좌에서 온 초대장>이 차례대로 자리잡고 있다.

아사다 지로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쳐낸다. 역자후기에서 작가를 가리키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이 딱 들어맞는다. 부유했던 집안의 몰락과 앞서 말한 여성 의류 사업은 물론 젊은 시절에 겪었다는 야쿠자 생활까지, 저자의 다양한 경험은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에 수록된 그의 단편들이 그 짧은 길이 안에 독자를 잡아 끄는 힘과 여운이 남는 결말을 적절히 담아내는 것은 아마도 그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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