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ourne Identity / 본 아이덴티티 (2002)

진지하고 고뇌하는 스파이의 개과천선 이야기 『본 아이덴티티』는 표면상으론 국가의 이익에 매몰된 개인의 정체성을 찾는 주인공을 묘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수퍼히어로의 자각을 다룬 영화 같기도 하다. 주인공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망각의 어둠속을 헤매면서도 이미 몸으로 체득해버린 놀라운 능력들을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하나 둘 꺼내놓는다. 영화 초반 제이슨 본이 스위스에 도착한 후 공원에서 순찰중인 경찰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의 첫 번째 능력이 발휘되는데, 그는 곧 1대 다수의 격투에도 능하고 다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매사에 주도면밀한 것으로 밝혀진다. 영화가 그 모든 것을 조금씩 보여주는 방식은 마치 빨간 복장 이전의 피터 파커가 스스로의 능력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해 보인다. 기억상실증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설정은 그를 깨우침 이전의 영웅처럼 묘사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체제나 기관을 뛰어넘는 개인의 존재는 공동체(?) 히어로물 ‘엑스맨 시리즈’ 정도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영웅물의 주된 소재다. 다만 제이슨 본의 여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능력이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쓰인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우리는 그의 능력이 어떤 일이든 헤쳐 나갈 만큼 대단하다는 것을 영화 전반부에 이미 알아챈다. 즉 그의 능력은 이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지만 결정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문제는 그러한 능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 지에 관한 의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본 아이덴티티』의 재미가 있다. 탄생 자체를 스스로가 의문시하는 히어로는 아마 제이슨 본 이외엔 ‘엑스맨’의 울버린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잘 알려진 이들 중엔). 설령 『본 아이덴티티』의 원작이 일찍이 쓰여 졌다 해도 영화가 발표된 시점에선 확실히 트라우마에 사로잡히거나, 생활고에 시달리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영웅상이 트렌드였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더 이상 관객들은 완전무결한 히어로에 흥미를 느끼지 않으며 어딘가 비어있고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 영웅들에 더 열광한다. 제이슨 본은 온갖 요소들을 갖춘 주인공이지만 결정적으로 기억(자신)을 잃어버린 영웅으로 그 조건에 적합한 인물이다.

 


영화 초반에 CIA소속의 등장인물들이 일찍 등장함으로써 우리는 그들과 본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말하자면 관객은 기억을 잃어버린 제이슨 본(그래서 더 이상 쓸모가 없을)이 이후 그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는 것까지 예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영화의 방향을 미리부터 결정짓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론 본의 정체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설정을 좀 더 길게 유지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본 아이덴티티』는 다른 곳에서 이 빈 곳을 채운다. 그것은 이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액션씬과 추격 장면. 하지만 확실히 1편의 액션 연출은 2,3편에 비해 얌전한 수준이다. 이것은 각 작품의 지향점이 달랐다기 보다는 덕 라이먼과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 스타일의 차이다. 과감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 등으로 액션의 속도에 왜곡을 가하는 폴 그린그래스와는 달리, 1편의 감독 덕 라이먼은 다소 고전적인 방법으로 액션을 표현한다.

영웅의 이야기와 함께 『본 아이덴티티』는 2,3편 같은 액션의 판타지로 기울기 보다는 제이슨 본을 둘러싼 탄생의 미스터리를 바탕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체제를 뛰어넘어 확립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본이 포함된 트레드스톤이 좌초된 이후에도 블랙브라이어라는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엔딩으로 보아,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 대답은 냉소적인 것이 되어 버렸지만.



* 시리즈의 정통성을 이어나가는 것은 사소한 것으로도 가능한 것 같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선 영화장면을 활용한 인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의 오프닝이 그 기능을 하는 것처럼, ‘본 시리즈’는 Moby의 “Extreme Ways"와 함께 모션그래픽의 엔딩 크레딧이 그 역할을 다 한다.

* 이미지출처 Daum 영화

2007/10/11 - The Bourne Ultimatum / 본 얼티메이텀 (2007)
2007/10/11 - The Bourne Supremacy / 본 슈프리머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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