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식당에 가면 과식의 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편이다. 함께 식사를 하는 가족과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핀잔을 준다. 그 핀잔의 내용은 음식을 조금 남기는 편이 먹을 것에 대한 초연한 태도를 드러내 먹는 이의 사회적 지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농담 섞인 것에서부터 이런 행동이 제어되지 않는 습관이 될 경우 맞을 수 있는 내 건강상의 문제에 대한 걱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항상 음식을 다 먹으려 하지 말고 적당히 조절하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이게 잘 되지 않는다. 아마도 어린 시절 먹을 것에 대한 집착과 남겨진 음식에 대한 아쉬운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시작된 이 행위가 우려했던 대로 이미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나의 이런 행동이 저 멀리 아프리카 남부 어느 스러져가는 움막집에서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채 곯고 있는 5세 남짓의 어린아이를 가엽게 여기는 인류애로부터 비롯된 것이 절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최근엔 아직 위의 용량이 한계점에 이르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몇 숟가락을 남기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어떤 윤리적 잣대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으면 음식을 남기는 행위가 하나의 의도되지 않은 죄악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가 생산해내는 식량의 양은 전인류를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아무 거리낌없이 남기고 어떤 이들은 부족해 죽어간다. 물론 저자가 책에서 밝히는 기아는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워야 해결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원인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주로 아프리카와 남미국가의 국민들이 직면하고 있는 만성적 영양실조나 기아로 인한 죽음은 정치적, 환경적, 경제구조적 원인으로부터 촉발한다.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에선 군벌독재자들의 이익 때문에 수많은 국민들이 빈곤함에 내몰린다.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국가내부의 갈등은 내전을 일으키고 국제구호단체의 도움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심지어 일부 국가들에선 하루하루 죽어가는 국민들을 살리기 위한 외부의 도움이 기득권세력의 체제를 강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환경적 원인으로는 대표적으로 토지의 급격한 사막화가 있다. 아마존을 비롯한 대규모 삼림이 기업들의 남벌 등으로 파괴되고 있거나 이미 오랜 세월 사막화가 진행된 아프리카에선 그 속도가 한층 빨라지고 있다. 훼손된 자연은 생명의 싹을 틔우지 못한다. 어떤 나라는 대부분의 국토가 경작에 부적합한 토지로 이루어져있다. 자급자족의 방법으로도 자국의 식량난을 타개할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다.

세계의 경제구조를 살펴봄으로써 기아의 원인을 밝히는 작업은 이 책에서 가장 힘있게 다뤄진다. 장 지글러 역시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규제의 완화와 시장간의 장벽을 철폐할 것을 부르짖는 이 경제체제는 자본과 자원에 대한 강대국들과 국제적 기업들의 독점화를 가속화시킨다. 식량도 예외 없이 소수의 손에 쥐어져 이익의 극대화 같은 ‘신자유주의’의 절대적 행동강령을 위해 사용된다. 식량이 그것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대상에게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가져다 주는 대상에게 소비되는 것이다. 먹는 행위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으로 보는 저자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식량분배의 구조가 다른 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고유의 특성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장 지글러가 밝히는 기아의 원인은 이렇게 단순화시키기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연구실에서 머리만을 사용하는 소극적인 학자로서가 아니라 기아와 기근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직간접적인 도움의 방법을 모색하는 행동가로서 이 책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 지구의 반쪽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현실을 타개할 목적으로 제시하는 방법들도 왠지 설득력 있다.

불행한 이들을 가엾게 여겨달라는 감상적인 호소가 아니다. 장 지글러는 무엇보다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해당 국가가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단체의 구호와 지원은 일시적인 방편일 뿐 궁극적인 문제해결방법이 될 수 없다. 여기엔 체계적이지 않은 지원체계와 일부 국가 내부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존재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지금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비인간적인 시장원리주의 경제의 얼굴을 바꾸는 것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을 같은 출발선상에 놓고 자유를 부르짖는 이 모순의 얼굴은 부의 집중과 빈국의 확대를 가져오고 기아와 기근을 심화시킨다. 이것의 타개는 개개인의 인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고 체제를 손보면서 진행될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 아니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국가들의 기아문제를 자연도태와 연결 지어 생각하려 한다. 즉 인구증가로 인해 발생할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해 자연 스스로 굶어 죽는 이들을 만들어낸다는 얘기다. 알고 보면 이만큼 끔찍한 말도 없다. 지금의 세계는 인간이 반목과 연대를 거듭하며 만들어온 것이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이 세상의 저 어두운 이면을 마치 자연발생적인 것처럼 여기며 꺼져가는 생명들을 똑바로 바라보길 거부하는 것은 일견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하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으며 책의 내용을 음식을 남기지 않는 나의 습관과 억지로 연결해보려 했던 저 시도 또한 비겁한 현실도피, 혹은 천박한 자기위안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을 선택할 때의 가벼운 마음가짐은 이 세계의 실상에 공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순결한 목적보다 그저 그 현실을 앎으로써 스스로의 위치에 안도하는 일종의 교양속물의 그것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얻었을까? 생생한 현실 인식? 아니면 내가 비교적 먹고 살만한 환경에 놓여있다는 일종의 안도감? 그것도 아니라면 장 지글러가 생생하게 전한 저 끔찍한 현실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에 머무르게만 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다.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