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2008)

여기 영광의 시절은 모두 지난 한 프로레슬러가 있다. 대전료는 쥐꼬리만하고 몸은 무분별한 약물사용으로 인해 심장마비가 올만큼 노쇠했다. 밀리기 일쑤인 트레일러 임대료를 꼬박꼬박 내기 위해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는 슈퍼마켓 지점장의 모욕적인 언사도 한쪽 귀로 흘려야 한다. 젊은 시절의 과오로 딸과의 관계는 최악. 마음 가는 스트리퍼는 손님과는 데이트하지 않는다며 호감을 거절한다. 냉랭한 현실을 견딜 진통제가 있다면 얼마 되지도 않는 레슬링 관중들의 환호. 그것은 주인공 랜디(미키 루크)로 하여금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차가운 바깥세상으로부터 그를 보호할 유일한 방어막이 된다. 레슬링은 돈도 가족도 건강도 잃어버린 이 사내가 하루하루를 견디는 원동력이다.

 


그런가 하면 여기 영광의 시절이 언제였나 기억나지도 않는 한 배우가 있다. 한때 섹시한 남자배우의 대명사였지만 이젠 성형수술과 약물남용으로 망가져버린 얼굴만 남았다. 대중들에게 기억될만한 출연영화의 제작연도를 살펴보는 것도 낯선 일이 되었다. 가진 게 없는 이 배우가 그래도 돌아올 곳이라곤 영화뿐이었나 보다.


<더 레슬러>는 그렇게 미키 루크의 영화가 된다. 퇴물 레슬러와 한물간 영화배우의 공통점이 관객의 영화로의 감정이입을 돕는다. 그래서 <더 레슬러>를 보는 동안 이것이 레슬러 랜디 ‘더 램’의 인생인지 배우 미키 루크의 이야기인지 헷갈린다. 예전의 잘생긴 모습은 찾을 길이 없는 이 늙고 투박한 사내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면 그게 진짜 외로움과 회한에서 흘리는 눈물일 거라는 믿음마저 생긴다. 당신의 인생, 왜 이렇게 쓸쓸하니.

그러나 그 묘한 감정의 포갬은 동정이나 용서 같은 단어로 잘 표현되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어가겠다는 랜디의 의지를 동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니와, 딸과의 어려운 화해 후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간신히 찾은 기회를 말아먹는 그 행태가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더 레슬러>는 보다 설명하기 힘든 심리상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머리로는 지금 그의 처지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그런 상태. 불쌍하지만 불쌍하지 않은, 용서받길 바라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바로 이것이 <더 레슬러>가 알량한 공식으로 관객의 눈물 한 방울을 짜내려는 싸구려 신파가 아니라는 증거다. 쉽게 준 동정만큼 쉽게 잊혀지는 것도, 기꺼이 하는 용서만큼 그 진정성이 의심되는 것은 없으니까.


랜디, 아니 미키 루크는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널찍한 등을 수없이 보여준다. 기침하는 얼굴이나 눈물 흘리는 앞모습을 돌려 가리는 등, 면도날에 그어지고 철사에 긁히고 스테이플러가 박힌 상처가 그대로 남은 그 등 말이다. 과거의 실수에 후회도 해보지만 그저 흐느낌만으로 그 후회를 대신해야 하는 그 넓디 넓은 등. 눈 앞에 보이는 그 커다란 등이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내내 한없이 왜소해 보인다.

그러다 영화의 마지막, 왕년의 프로레슬링 스타들이 모이는 이벤트 시합의 입장장면에서 그는 아마도 영화의 러닝타임 중 가장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앞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관중들의 환호가 울려 퍼지는 바로 그곳에 마치 이 사내의 인생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듯하다. 짜고 치는 쇼라지만 합이 조금만 어긋나도 목이 부러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위험천만한 사각의 링이 랜디에게는 바깥세상보다 안전한 둥지다. 그 누구의 잘못이었든 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남자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거구의 몸뚱이를 날린다. 마치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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