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후쿠아의 작품들은 액션영화의 마초중심적인 외피 속에 풍부한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스타일에 집착한 시각적 이미지로 승부하는 영화들이다. 아마도 지금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이 궁리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현란하고 더 강렬한 이미지들을 더 많이 보여줄 것인가에 관한 물음일 텐데, 안톤 후쿠아도 홍콩 느와르의 형식을 헐리우드 속에 녹여내려 했던 데뷔작 『리플레이스먼트 킬러』(1998)에서부터 줄곧 스타일리쉬한 액션씬을 짜내는데 골몰한 흔적이 보이는 감독이다. 뮤직비디오 출신의 감독들이 대개는 그렇듯 그도 영화의 이미지에 집착한다. 안톤 후쿠아의 최고작 『트레이닝 데이』(2001)는 그런 의미에서 조금 다른 영화였다. 이 영화는 액션장면 자체가 주인공이 되지 않고 두 인물(덴젤 워싱..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올해 존 쿠잭 주연의 영화 『1408』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상하게도 작년에 본 영화『사일런트 힐』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별도의 원작(각각 스티븐 킹의 소설, 일본 코나미사의 게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은데, 그나마 공포의 소재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환상을 다뤘다는 점이 비슷했고, 아마도 두 영화의 결말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매듭짓는 방식이 서로 달랐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1408』은 주인공 엔슬린이 겪은 환상이 결국 현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면서 관객의 공포를 이끌어내려 했지만, 『사일런트 힐』은 마지막까지 현실과 환상이 서로 절대 만나지 않는 평행선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일런트 힐』..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표정이 많지 않은 배우다. 격한 감성을 표출하는 캐릭터, 또는 여러 가지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발산하는 역할은 왠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고뇌에 휩싸여있을 때도 그의 얼굴은 오히려 무표정하다. 그는 분명 평소에 온화한 얼굴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보여주는 미소는 차라리 냉소(冷笑)에 가깝다. 그 인상과 특유의 미소 또한 매력적인 것임은 분명하나, 이것이 동시에 그를 ‘차가운 신사’ 이상의 이미지로 포장해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얘기해 이미 영광의 시절이 지나버린, 중년의 이 배우는 『미스터 브룩스』에서 그 자신의 캐릭터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살인행위에 중독된 자신을 타일러보지만, 그게 제..
전편인 『판타스틱 4』(2005)의 전 세계적인 성공은, 이제 잘 만든 특수효과 하나로도 영화 제작자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거대한 제작비를 들인 영화들에 한해서, 캐릭터에 대한 공감이나 촘촘히 짜인 플롯의 흡입력 같은 전통적인 영화의 매력들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판타스틱 4』의 미국 내에서의 성공은 아마도 원작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추리해 낼 수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3억 달러가 넘는 높은 흥행성적은 원작만화의 매력만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헐리웃의 자랑인 특수효과와 세계적인 미녀 아이콘 제시카 알바가 유일한 장점이었음에도 『판타스틱 4』는 일정이상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전작의 성공을 발판으로 네 명의 ‘판타스틱’한 영웅들은 ..
1969년 7월 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발레이오(Vallejo)의 블루 락 스프링스 골프코스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연인이 괴한으로부터 총격을 받는다. 이 사건으로 여자는 죽고 남자는 살아남는다. 같은 해 8월 1일, 샌프란시스코의 신문사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범인으로 보이는 자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집장에게 직접 전달할 것을 요구한 편지의 작성자는 앞선 사건의 범인이 바로 자신이며, 자신이 누군지는 함께 동봉한 암호문에 나와 있다는 내용을 편지에 담았다. 의문의 편지에는 사건에 대해 범인과 경찰만이 알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범인이 보내온 암호문에 관심을 갖게 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삽화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Robert Graysmith: Jake Gyllenhaal)는 어느 ..
“내 말에 영화내용이 섞여있을지도 몰라. 주의해서 봐줘.” “아마 그때쯤이었을꺼야. 우리 가족은 테니스를 치고 있었거든. 나는 엄마랑 편을 먹고, 형은 아빠랑 한편이 됐어. 근데 두 사람이 엄마의 약점인 백핸드쪽으로 자꾸 샷을 때리더라구. 엄마는 당연히 못 받았고, 기분이 나빠진 것 같았어. 아빠가 뭔가 달래주려고 했지만, 별 효과는 없는 것 같아. 아무래도 부모님 사이가 뭔가 이상해... 확실히 이상해졌어.” “아, 내가 누구냐구? 나는 프랭크, 프랭크 버크만이야. 우리 아빠는 버나드 버크만, 엄마는 조운 버크만, 그리고 월트라는 형이 있어. 아빠 엄마는 모두 글을 쓰시는데, 아빠는 요즘 잘 안되나봐. 그냥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계셔. 반대로 엄마는 잡지사에서 연락도 오고 곧 소설도 발표 할 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