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위의 포뇨 / 崖の上のポニョ

단순히 러닝타임을 통해 소비되는 것만이 아니라 감상 후에도 여러 가지 영감을 전해주는 애니메이션 작품을 하나의 상품처럼 비유하는 게 썩 내키진 않지만, 어쨌든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이름은 마치 하나의 건전한 품질보증서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작품에 대한 사전기대와 사후만족도에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이웃의 토토로>로부터 시작된 감독에 대한 신뢰가 크나큰 기대감으로 바뀐 이후에도 결코 실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붉은 돼지>나 <원령공주> 같은 작품들을 애써 폄훼하려 해도 떠오르는 어휘가 없는 것이다.

다만 한 명의 관객으로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로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놀라운 상상력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미야자키의 세계는 여전히 흥미롭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등장할 때마다 자연스레 지어지는 미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상천외한 친구들은 그 수가 더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세 마리 토토로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담긴 메시지와 기본 뼈대들,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경외의 시선이라든지 생의 고비를 딛고 성장하는 소년, 소녀들, 혹은 넘치는 생명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신비의 캐릭터 등은 여전히 그의 영화 안에서 당당히 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중에서 화려하게 채색된 캐릭터만이 더욱 돋보이는 느낌이다. <원령공주>가 그것을 뚜렷한 메시지와 함께 나란히 보여주는데 성공한 이후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선 그런 잘 조율된, 작품의 풍성한 느낌이 조금 상쇄되었다고 느껴졌다.

 


<벼랑 위의 포뇨>는 아마도 그 연장선 상에 선 작품이 아닐까 한다. 시종일관 ‘소스케 좋아’를 외치며 화면 속을 이리저리 뛰노는 포뇨는 자연의 엄청난 생명력을 그대로 형상화한 듯 보인다. 그러나 보는 이의 눈과 귀를 잡아 끄는 것은 이 작은 인면어가 간직한 의미가 아니라 아역배우의 입을 통해 녹음된 참을 수 없이 귀여운 그 목소리다. 마법을 걸어보려 애쓸 때 단순한 형태의 눈과 입만 보이는 그 얼굴도 귀엽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처럼 보일 때도 보는 이의 마음을 간질인다.

거기다가 그 행동은 또 어떻고. 소스케를 향한 일편단심은 ‘인어공주’라는 원전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으레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호감을 떠올리게 한다. 어른스런 소스케와 천진한 포뇨가 화면 속을 뛰노는 것을 보고 있자면 아이들의 세계엔 어른들이 상상 못할 어떤 정신적 경지가 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대상을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좋아해본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하는 일말의 안타까움과 함께.

 

 

두 주인공을 통해 마치 자신이 보고 싶은 손자, 손녀를 그려내는 듯한 작품 속 미야자키 하야오의 시선과 그 지향점은 두 캐릭터의 귀여움만으로도 충분히 충족될 수 있다. 노년의 애니메이션 작가가 그려낸 ‘인어공주’ 이야기가 원래의 비극적인 정서를 지워내고 희망으로 가득 찬 결말을 보여주는 것은 이를 통해 인생의 어떤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지금 현재 보고 싶은 것을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대해 느끼는 약간의 아쉬운 감정, 즉 <이웃의 토토로>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볼 때 느꼈던 그 충실한 감상에 비해 이 작품이 조금 부족하게 생각되는 것은, 어쩌면 포뇨의 순진무구한 목소리에 지나치게 빠져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스로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기대감을 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일지도. 이제 와서 그의 예전작품에서 느꼈던 그 설렘과 환희를 똑같이 느끼고자 하는 것이 한 관객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의 감성과 공간은 두 번 다시 재현해낼 수 없는 것이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무엇이 그 느낌의 차이를 만들어내는지조차도 분명치 않다. 다만 비록 이전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낼 수 없더라도 이 노장의 작품들을 계속 감상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변치 않는다. 부디 앞으로도 오래오래 활동해 주세요.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