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들어서니, 파리에 도착했다는 느낌 때문인지 대도시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내가 맡은 것이라곤, 그저 공항을 오가는 사람들의 냄새, 공항 내 상점에서 풍기는 방향제의 향기 따위였을 테지만, 그런 냄새들이 섞인 채 내 후각을 자극할 때면, 내 두뇌 어딘가에서 그것은 도시의 냄새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곤 한다. 나는 대도시에 대한 호감이 있다. 소설가 김중혁이 그의 어느 소설집 뒤에 남긴 작가의 말에 동의하듯, 나는 '속된 도시'가 좋고 앞으로도 그곳에서 살아가고 싶다. 방향을 바꿔가며 끝없이 연결된 도로와 우러름을 강요하는 마천루에 매혹을, 자연 그대로가 아닌, 사람 손을 탄 장식처럼 펼쳐진 도심 공원과..
전날 겔레르트 언덕에서 곧장 호텔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부다 지구 아래쪽까지는 버스를 타고 내려왔고, 거기서부터 다리 건너 페스트 지구까지는 걸어왔는데, 야경을 이대로 두고 바로 잠을 청하기는 아쉬워 강 건너 부다 왕궁이 뿜는 빛을 한 시간 남짓 감상했다. 내 보잘것없는 사진 실력으로 이 불빛을 담아내긴 역부족이었지만, 눈으로라도 더 봐둬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도나우 강변엔 추운 밤 바람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시민들. 왁자지껄하게 젊음을 뽐내는 청년들. 나처럼 여행자의 것처럼 보이는 두툼한 백팩을 등뒤에 맨 채 왕궁을 바라보거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왕궁 사진을 몇 장 찍어보다 초점도 맞지 않고 손도 차가워져 그만두고 주변 사람들을 구경했다. 부다 왕궁의 빛. 그것은 ..
어부의 성채를 벗어나 부다 왕궁(Buda Castle, Budavári Palota) 쪽으로 걸어 나왔다. 머리 속에서 왕궁까지 걸었던 경로가 희미하다. 왕궁 주변에 위치한 날개를 편 투룰(Turul) 상과 말을 탄 외젠 왕자(Prince of Savoy-Carignan, François Eugène)의 청동상을 본 기억이 또렷한데 거기까지 가는 순간에 대한 기억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잊은 걸까. 인도 바닥의 조각난 보도블록이 눈에 잠깐 스친 것도 같고, 살갗에 닿는 차가운 바람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환한 볕도 생생한데, 어떤 경로로 외젠 왕자 앞에 서게 되었는지는 떠올려지지 않는다. 시간을 거슬러 그 망각의 이유를 찾다 보니, 한 생각이 떠올랐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날 잠자기 전 구상한 다음날의 ..
신발은 밤새 잘 말랐다. 동유럽의 겨울은 바깥이 충분히 추워서인지 어느 실내든 들어서면 따뜻한 기운이 충만했다. 밤새 뜨끈하게 틀어놓은 히터가 신발은 물론이고 옷가지에 스민 습기를 모두 먹어 치웠다. 둘째 날에도 비가 온다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질척해지는 신발을 신고 거리를 걸어야 할 터였다. 일어나니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다. 방으로 스며드는 햇살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다행이다'라고 외쳤다. 잠들기 전 내일의 날씨가 맑기를 잠깐 기도했던 것도 같다.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오묘한 느낌을 준다. 처음 보는 창 밖의 풍경이 비현실적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바라보던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어색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다. 부다페스트에서 맞는 둘째 날 아침의 창 밖 풍경은 빗방울이나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지 ..
2011년 말, 유럽에 가게 된 것은 장기출장 덕분이었다. 밤이 되면 세상이 사라지듯 컴컴해 지는 겨울의 동유럽에 머무는 동안, 긴 크리스마스 연휴엔 주변국 몇 도시를 돌아봐야겠다 마음 먹었다. 딱히 떠오르는 곳이 없어 그리 멀지 않고 큰 비용도 들지 않을 곳을 검색했다. 여행이란 세세한 목적도 거창한 목표도 없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적합한 곳이었으면 했다. 우선 부다페스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곧 이어 파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여행지는 절반은 즉흥적으로 정해졌다. 두 도시의 호텔을 검색하여 예약하고 기차표와 비행기표를 구입한다.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해 놓으면 별다른 걱정은 없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날,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에서 부다페스트로 가는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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